(서울=연합인포맥스) 우리나라 2천34만 가구 중 집을 소유한 가구는 56%인 1천145만 가구에 불과하다. 세상이 온통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기 집이 없는 가구는 절반에 가깝다. 무주택 가구 889만 가구 중 그나마 공공임대주택의 혜택을 받는 가구는 8%(160만 가구)에 불과하다. 나머지 730만 가구는 전·월세값이 오를까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다. 수년 새 집값이 너무 오르고 대출마저 막히면서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 꿈'은 진짜 꿈이 돼 가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내 비개발 지역이나 지방에 가보면 길거리 곳곳에 세워진 전봇대에 '빌라 임대·매매'라는 글귀가 새겨진 전단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위 브랜드 아파트들이 아직 침투하지 못한 지역들에서는 여전히 연립과 다세대 주택으로 불리는 빌라가 무주택자들의 주요 거처다. 고가 아파트를 살 처지가 못 돼 상대적으로 저렴한 빌라를 생애 첫 내 집으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다. 아파트에 비해선 거주 만족도가 떨어지는 게 현실이긴 해도 그나마 가격이 아직까진 저렴해 서민들에겐 여전히 안락한 삶의 터전이 된다.

하지만 빌라도 이젠 그들에겐 장벽이 돼 가고 있다. 서울의 경우 빌라의 중위 매매가격(올해 7월 기준)은 3.3㎡당 2천30만원으로 사상 처음 2천만원을 넘어섰다. 20평대 빌라 한 채를 사려고 해도 이젠 4억원 넘게 줘야 한다는 얘기다. 1년 전과 비교하면 가격이 무려 9% 가까이 올랐다. 한국부동산원이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6년 1월 이후 최고치였다. 아파트값이 너무 올라 빌라로 눈길을 돌리는 젊은 층들의 수요가 몰린 영향이기도 하지만 실상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법원경매 전문기업 지지옥션이 매월 발표하는 경매 동향 보고서를 보면 지난달 주택 경매 낙찰률과 낙찰가율은 모두 20년 만에 최고였다. 울산과 부산, 광주 등 지방의 경우는 낙찰가율이 10% 안팎이나 뛰었다. 비규제 지역이 많은 전남과 충남, 강원의 낙찰가율 상승률도 5%를 넘어섰다.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특히 빌라의 낙찰가율이 큰 폭으로 뛰었다. 수도권의 경우 빌라 낙찰가율은 89.7%로 전월보다 무려 10.0%포인트 뛰었다. 눈에 띄는 것은 실수요보다는 재개발 등의 개발 호재를 노린 투기성 수요가 많았다는 점이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천준호 의원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빌라 수요가 왜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1년 새 법인 명의로 전국서 매매된 주택은 무려 4만6천858채였다. 이 중 부동산 매매업과 임대업을 하는 부동산 법인이 사들이 주택은 3만6천500채였다. 매수 가격은 평균 3억2천800만원이었고, 실거래가 1억5천만원·공시가격 1억원 안팎의 주택 매입 비중은 54.7%(2만5천612건)에 달했다. 이들 법인이 이러한 '저가' 주택을 대량으로 사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세금 혜택을 보기 때문이다. 공시가격 1억원 미만 주택은 취득세 중과가 면제돼 몇 채를 사더라도 세금 폭탄을 피할 수 있다.

대형 10개 부동산 법인이 사들인 주택만 5천431채다. 1년 동안 무려 1천327채를 사들인 부동산 법인도 있다. 이 법인은 광주에서만 308채, 부산과 경기에서 각각 296채와 233채를 사들였다. 어떤 법인은 경남에서만 1천300채를 산 경우도 있다. 무슨 돈으로 이 많은 집을 샀을까. 대출이 33.1%였고, 임대보증금이 17.9%였다. 집을 사는데 자기 돈은 26.8%밖에 들이지 않았다. 쉽게 말해 전세나 월세를 끼고 대출받아 집을 쇼핑한 셈이다. 다주택자 규제를 강화하겠다면서 법인의 취득세를 보유 주택 수와 관계없이 12%로 크게 올리고 종부세도 대폭 올렸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빌라 매매 가격이 뛰고 덩달아 임대 가격도 큰 폭으로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부동산 세금을 감내할 정도의 부동산 투기 수익이 발생하고, 경우에 따라선 개발 호재를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돈이 그쪽으로 옮겨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싹쓸이 한 지역에서 도시정비사업이라도 벌어진다면 엄청난 '알박기' 효과를 보게 된다. 그 사이 집값은 계속 뛸 것이다. 전·월세 가격은 뛰는 집값을 따라 갈 것이다. 결국 상대적으로 저렴한 빌라에서라도 안정된 삶을 살려던 서민들은 부동산 법인들의 싹쓸이 쇼핑의 희생양이 돼 가고 있다.

국세청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부동산 법인들의 총수입은 무려 453조3천8억원에 달했다. 2016년 72조3천억원이던 수입은 2020년 99조7천억원으로 25조원 이상 폭증했다. 같은 기간 3만4천806개이던 부동산 법인은 지난해에는 5만4천208개로 급증했다. 특히 상위 1% 부동산 법인 542개가벌어들인 수입은 지난해 기준 67조4천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이 낸 세금은 1조4천억원에 불과하다. 전국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은행 돈을 종잣돈 삼아 가격이 싼 빌라 등 주택을 대거 쇼핑해 온 부동산 법인들만 웃고 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전봇대에 붙은 빌라 임대 전단을 보고 집을 구해야 하는 서민들만 운다. 수천억 원대 불로소득을 얻고 '50억원 클럽' 잔치를 벌인 화천대유가 성남 대장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곳곳에 있는 전봇대 속에 숨은 또 다른 화천대유를 그대로 방치해 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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