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997년 현대전자는 공채로 200여 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다. 하지만 합격 통보서가 갑자기 합격 취소 통보서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가부도' 사태로 불리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들이닥친 탓이다. 부당하다며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끝내 법원도 사회 초년생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풍경은 비일비재했다. 돈줄이 막혀 생존의 위협을 받던 대기업들은 사람을 뽑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내보낼까를 고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엄청난 박탈감을 느꼈던 청년들이 'IMF 학번'이다. 1990~1994년 즈음 대학에 입학한 세대다.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이다. 스스로 '저주받은 세대'라며 분노를 삼키고 살아야 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끝물인 1960년대 초중반 세대는 '3저 호황' 속에 경제가 우상향하던 1980년대 대학에 들어간다. 잔악한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던 소위 '386세대'다. 시대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사회와 부딪치면서 살아온 세대였다. 하지만, 취업에서만큼은 사실 고민이 그리 크지 않았다. 취업 시즌이 되면 여러 기업에서 입사추천서를 받기 수월했고, 어느 회사를 갈까 행복한 고민도 하던 때다. 당시 모든 청년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들에게는 상당한 '특혜'였음에 틀림없다. 물론 이 세대도 IMF는 똑같은 고통이었다. 대기업들의 몰아치기 명예퇴직과 해고의 파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IMF를 거쳐 세상은 더욱 거칠어졌다. 취업에 대한 특혜도, 고용에 대한 보장도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IMF 사태가 그나마 빠르게 극복되고 이후 취업 시장의 문도 조금씩 열렸지만, IMF 학번들은 여전히 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취업 추천서라는 특혜는 사라졌고, 취업을 위해 엄청난 준비와 스펙을 쌓아야 했다. 그러한 풍경은 국가 경제 규모가 커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위기를 넘어선 기업들이 더욱 가파르게 성장했는데도 여전히 똑같다. IMF 학번의 당시 모습이 지금의 MZ세대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세상이 좋아진 것 같지만 당시 청년과 지금 청년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기업들의 인사철이 다시 돌아왔다. 관심은 누가, 어느 세대가 얼마만큼의 별(임원)을 차지하는지에 쏠린다. 기업의 임원 인사는 향후 1년간 그 기업이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성취해 낼 것인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이자 메시지다. 올해 기업들의 임원인사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는 세대교체의 폭이 얼마나 커질지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매년 세대교체라는 말은 등장해 왔다. 하지만 몇몇 발탁 인사를 침소봉대하는 수준이었다. 올해는 매우 다를 것 같다. 진짜 세대교체가 크게 벌어질 것 같은 조짐이다. 그간 기업의 주축이던 1960년대생이 퇴장하고 1970년대생이 중심에 떠오르는 해가 될 것 같다. IMF 사태를 축으로 전후 세대가 진짜로 바뀌는 세대교체 말이다.

흔히 기업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부장급에서 상무급으로 승진하면서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미 1970년대생들은 기업 임원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한국CXO연구소가 삼성 등 5대 그룹의 임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작년 말 이후 임원에 이름을 올린 330명 중 1971년생이 42명으로 가장 많았다. 1972년생이 40명으로 두 번째였고 1970년생(33명)과 1974년생(27명), 1973년생(22명)이 각각 3위, 5위, 7위였다. 1970년 초중반생들의 비중은 절반에 가까운 45.5%였다. 새로운 별들을 이미 IMF 학번들이 차지했다는 얘기다. 이러한 추세는 올해 더욱 가팔라질 것 같다. 그런데도 주요 의사결정의 정점에 선 'C 레벨'(최고경영자(CEO),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경영 및 사업부문별 책임자)의 사람들은 여전히 1960년대생들이다. 상무급의 초급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을 세대교체라고 보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는 세대교체를 더욱 촉발하는 계기이자 변수가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그에 따른 기업의 대응 능력 및 전략 재편 방향 등 모든 것들이 바뀌고 있다. 임원의 최고 능력은 '관리'라던 인식은 옛말이 돼 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단순히 별을 다는 것을 넘어서 C 레벨, 또는 CEO급에 오르는 1970년대생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심지어는 1980년대생 임원은 물론 CEO급의 젊은 인사들도 등장한다. 시대 경험은 달랐지만, IMF 사태라는 엄청난 고통을 같이 겪었던 두 세대가 코로나19를 계기로 바통터치를 하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퇴장과 등장을 동반하는 인사는 늘 가혹함과 기대감이 맞부딪친다. 세대교체라는 말은 더 그렇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 자연스럽게 맞닥뜨려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달라진 세상에 대응하는 기업들이 어떻게 세대교체를 준비하는지 관심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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