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999년 3월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 현대그룹은 초긴장 상태였다. 3월 2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동생인 정세영 명예회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부른다. 그러면서 장자인 정몽구 회장에게 자동차 사업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자동차 사업을 두고 형제간 다툼이 벌어졌다는 소문은 현실이었다. 정세영은 형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현대차의 경영권과 이사회 의장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했다.

3월 4일 정주영은 현대차를 포기한 동생 정세영에게 현대산업개발을 떼어 주기로 했다. 일종의 보상이었다. 다음 날인 3월 5일 정세영과 아들인 정몽규 현대차 회장은 보유하고 있던 현대차 지분 8.33%를 모두 정몽구에게 넘긴다. 대신 정주영과 정몽구, 현대정공이 보유 중이던 현대산업개발 지분 37.67%를 받아 온다. 주식 맞교환을 통해 일사천리로 현대차의 지배구조는 정리됐다. 경영권 포기 요구 나흘만의 전격적인 변화였다.

1967년 현대차 초대 사장에 취임해 1999년 현대차 지분을 모두 처분하기까지 32년간 정세영에게 현대차는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1968년 1호차 코티나를 생산했고, 1974년에는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개발해 1976년 국내 최초로 에콰도르에 수출까지 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은 '포니정'이었다. 정주영과 함께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함께 써온 그였다.

그랬던 그에게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라는 형의 요구는 부당했을지도 모른다. 현대차를 떠나면서 남긴 "형이 설립한 현대차를 장자인 정몽구 회장이 이어받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속에는 복잡미묘한 마음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세영 일가는 현대산업개발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마음이 복잡했을 인물이 또 있었으니 정세영의 아들인 정몽규였을 것이다. 1988년 현대차 대리로 입사해 10년 만에 초고속으로 회장직에 올랐지만, 자동차 회사 경영이라는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물러나야 했다.

2005년 아버지 정세영이 작고하면서 현대산업개발을 더욱 키울 책임은 온전히 40대 초반의 젊은 총수 정몽규에게 돌아갔다. 정세영과 정몽규가 넘긴 현대차 지분 8.33%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조5천억원 가량 된다. HDC그룹 상장사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쳐도 1조7천억원 가량이니 두 배가 넘는다. 그간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기업가치가 커진 측면도 있지만, 현대산업개발 중심의 사업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HDC그룹의 성장이 정체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현대산업개발의 매출은 그룹 전체의 70%에 달한다. 정몽규는 사세를 확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용산아이파크몰을 열면서 유통업에 뛰어들었고, 호텔신라와 합작사를 만들어 면세사업도 벌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뛰어들어 국적항공사를 거머쥐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아시아나항공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직후 정몽규는 직접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러면서 "종합 모빌리티 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아버지 '포니정'의 꿈을 항공업을 통해 다시 펼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은 결국 그의 '모빌리티 꿈'을 접게 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 포기 이후 국내 최고의 디벨로퍼(종합부동산개발사)로 도약하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HDC그룹은 창사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이 광주 공사 현장에서 잇달아 대형 사고를 내면서 최고 수위의 처벌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최장 1년간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최악의 경우 등록 말소 조치 가능성도 언급된다. 실제로 현실화할 경우 존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일부 재개발·재건축 사업지에서는 아파트 브랜드 '아이파크'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다. 지난해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 철거 사고 당시 발 빠르게 수습에 나섰던 정몽규 회장은 최근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외벽 붕괴사고가 발생하자 침묵으로 일관하다 뒤늦게 사과했다. 현대산업개발 회장직에서도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책임 회피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HDC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2020년 8월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정몽규 회장을 직격했다. "시장 신뢰를 못 받는 경우 경제 활동에 있어 많은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책은행장의 지나친 압박성 경고쯤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실제화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지 못할 상황까지 온 것 같다. 모빌리티와 디벨로퍼라는 성장주의 비전에 빠져 본업인 건설업을 등한시 해 온 결과가 대형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성장은 본업에 대한 강한 신뢰 속에서 더욱 강고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정몽규 회장과 HDC그룹은 망각한 것 같다. 과거의 영광을 현재화하기 위해 벌여온 일들은 잠시 멈춰야 한다. 그리고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사라진 신뢰도 다시 잡을 기회가 생긴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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