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0조달러(한화 약 1경2천조원)의 돈을 굴리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작년 우리나라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1조9천억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5배나 더 많은 자금을 굴리는 곳이다. 글로벌 투자 세계에서 블랙록은 큰 손 정도가 아니라 '슈퍼 큰 손'인 셈이다. 블랙록을 움직이는 핵심 인물은 래리 핑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당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과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 연준 총재는 래리 핑크에게 SOS를 친다. 파산 직전의 베어스턴스의 부실 자산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래리 핑크는 '콜' 한마디로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칭은 '월가의 해결사'였다. 자금력이 곧 권력이 되는 장면이었다.

래리 핑크는 매년 초가 되면 글로벌 주요 기업들의 경영진들에게 연례 주주 서한을 보낸다. 한 해 동안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목적과 가치를 두고 투자할지를 설명한다. 블랙록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는 것은 상당한 신뢰를 구축한 곳이라는 일종의 긍정적 시그널로 읽히는 만큼 글로벌 기업의 최고 경영진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주목한다. 올해 그가 보낸 서한의 제목은 '자본주의 힘'(The Power of Capitalism)이었다. 래리 핑크는 "오늘날과 같이 전 세계가 밀접하게 연결된 상황에서 기업이 주주에게 장기적 가치를 제공하려면,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해 가치를 창출하고 모든 이해관계자가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회사의 번영에 영향을 주는 직원, 고객, 거래처, 지역사회와의 상생 관계로부터 얻는 추진력,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힘이라고 역설한다. 정치적이지도, 사회적, 이념적 논쟁도 아닌 이해관계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바라봐야 한다는 얘기다.

래리 핑크는 2년 전 연례 서한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기업들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고, 실제로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엄청난 변화를 보였다. 탄소중립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꺼리던 기업들은 너도나도 '2030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있다. 블랙록과 그를 따르는 거대 자본에 찍혀 주식을 모두 매각당하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싫든 좋든 뭐라도 해야 했다. 래리 핑크는 올해 연례 서한에서 2년 전 자신이 당부했던 기후 대응을 비롯한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대해 다시 한번 상세하게 설명한다. ESG는 이념적이거나 정치적인 의제가 아닌, 주주와 기업이 서로 이해를 도모하고 추구하는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환경주의자'가 아닌 '자본주의자'이며, ESG는 주주와 기업이 공동으로 번영하기 위한 필수적 수단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블랙록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화학 등 국내 굴지 대기업들의 주요주주다. 심지어는 금융지주사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급 주주이기도 하다. 2~4대 주주로 있는 기업 수만도 8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상당수의 대기업들도 래리 핑크가 쏟아내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지난 17일 SK그룹 주요 관계사의 사외이사들은 블랙록과 ESG 경영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글로벌 투자기관들이 바라보는 ESG는 무엇인지, ESG 경영을 위한 사외이사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ESG 경영을 위한 혁신적 개선 방안은 무엇인지 등이 주제였다고 한다. SK그룹뿐 아니라 다른 대기업들도 블랙록과 이런 식의 직접 소통을 주기적으로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블랙록을 비롯한 글로벌 대형 투자기관들이 주목하고 있는 이슈는 환경이다. 소위 탄소 배출을 사실상 제로 상태로 만드는 '넷제로'를 위한 기업들의 대응 방식을 투자의 판단 근거로 삼겠다는 것이 대세가 되고 있다. 최근 세계 3대 연기금 중 하나인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의 기금운용 자회사인 APG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화학 등 국내 10개 대기업에 기후 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APG는 한국과 아시아, 북미와 유럽 등에서 무려 850조원의 자금을 굴리는 거대 연기금이다. 기업 지배구조와 사회적 책임 등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투자를 하는 곳으로 최근에는 환경 문제를 주요 투자 이슈로 삼고 있다. 2020년에는 석탄화력발전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전력의 주식을 모조리 매각해 버리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글로벌 주요 투자기관들이 결성한 '기후행동 100+'(Climate Action 100+)가 우리 정부에 탄소 감축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제시하고 민간 석탄발전소 퇴출 문제를 해결하라는 '압박성'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기후행동 100+가 굴리는 자금만 55조달러(6경5천조원)에 달한다. 블랙록과 APG는 물론 세계 최대 채권운용사인 핌코 등 615개 글로벌 투자사들이 포함된 곳이다. APG가 최근 10개 기업에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것은 지난해 기후행동 100+가 요구한 압박을 실제 실행하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다. 정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도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대응에 나서지 않을 경우 본격적인 주주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셈이다.

국내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탄소배출 저감을 위한 환경 대책을 그저 생색내기 수준에서 대응했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있게 된 셈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지분을 팔아 돈을 빼가는 것은 물론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는 것조차 힘들어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성장과 이익 증가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투자가 필요한 게 기업들의 숙명이라는 점에서 그 종잣돈을 마련할 수 없게 된다면 심장을 거쳐 흘러야 할 피가 없어지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심장은 멈출 수밖에 없는 셈이다. 기업들이 느끼는 '넷제로 포비아(공포)'는 상상보다 훨씬 크다. 글로벌 투자자들의 압박에 더해 글로벌 공급망의 일원에서 배제되는 상황까지 내몰릴 수 있다.

소위 100% 재생에너지로 만든 제품만 생산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RE100도 현실적 위협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국내 기업 중 RE100에 가입한 곳은 SK그룹 8개 사와 LG에너지솔루션, 한화솔루션 등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애플, 구글, GM, 소니, P&G, 메타, 존슨앤드존슨, 화이자, 3M 등 글로벌 대기업 340여 개는 이미 RE100 회원사로 활동 중이다. 넷제로를 등한시하다간 이들 기업에 부품을 공급하지 못할 날이 머지않았다. 기업의 탄소배출 저감은 계획이 아닌 현실이 돼 가고 있다. 거북이 걸음을 걷는 정부의 대책만 따라가다간 늦는다. 이미 글로벌 경쟁자들과 투자자들은 생존에 위협을 줄 정도의 수준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전세계 산업계와 공급망 속에서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따라가야 한다. 혼자서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쿰파니스는 라틴어로 '함께(cum)'와 '빵(panis)'이 합쳐진 말로 동료나 친구를 뜻하는 컴패니언(Companion),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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