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고립무원이다. 글로벌 금융결제망이 막히면서 러시아 경제와 금융시스템은 거의 극단까지 몰렸다. 달러를 조달할 수단이 사실상 원천 봉쇄됐기 때문이다. 서방의 제재가 길어진다면 러시아 경제는 파국의 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포와 미사일 한 발 쏘지 않고도 군사 대국 러시아를 무릎 꿇게 하는 핵 전쟁급 위력이 발휘될 것인지 주목된다. 금융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러시아 은행 7곳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했다. 스위프트는 전 세계 200여 국, 1만1천 곳 이상의 금융기관이 사용하는 전산망으로 세계 금융의 핵심적인 인프라다. 스위프트에서의 퇴출은 러시아의 달러 조달이 사실상 막히게 됨을 의미한다. 제품 수출을 해도 돈(달러)을 받기가 어렵다. 세계 4위 수준의 외환보유액을 자랑하지만, 서방 세계가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동결 조치까지 내린 터라 급한 대로 달러를 빼서 쓰기도 어렵게 됐다.

러시아 은행들의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은 이미 시작됐다. 러시아 은행권의 유동성 부족분은 하루 5조에서 6조 루블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러시아 내부에서만 원화로 60조 원 이상의 머니 무브가 막혀버린 셈이다.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이 재연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러시아 신용등급 강등에 '사상 최저' 기록한 루블화 가치
(모스크바 EPA=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신용등급 강등에 따라 루블화 가치가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신용평가 무디스와 피치가 이날 러시아의 국채신용 등급을 투기등급(정크)으로 6계단씩 낮추면서 모스크바 외환거래소 환율은 달러당 117.5루블, 유로당 124.1루블까지 치솟았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만 해도 달러당 75루블 수준이던 러시아 통화 가치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사진은 전날 모스크바 시내 외환거래소에서 행인들이 유로·달러화에 대한 루블화 환율을 표시하는 전광판 앞을 걸어가는 모습. 2022.3.3 sungok@yna.co.kr








비단 러시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러시아의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면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장될 것이란 위기감도 적지 않다. 우선 러시아 국채 보유 기관의 디폴트(채무 불이행) 리스크다. 러시아 국채 금리가 폭등하고 설상가상으로 루블화 가치는 급락하면서 러시아 국채를 보유한 글로벌 투자은행(IB)의 대규모 손실이 우려된다. 글로벌 IB의 대(對)러시아 익스포저(위험 노출 자산) 규모가 불투명하다는 점도 문제다. 최근 씨티그룹이 새로 발표한 러시아 익스포저 규모는 약 100억달러로, 이전 수치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항목(러시아 중앙은행 예치현금 등)이 추가됐다. 정확한 러시아 익스포저 공개를 꺼리는 IB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2008년 불투명한 모기지 부실 관리에서 촉발된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달러 유동성 위기도 목전에 있다. 달러 조달 비용이 급증한 데서 그 위기감이 커진다. 미국 시장에서 유로화를 달러로 교환할 때 적용되는 가산금리는 지난주의 두 배에 달하고 있다. 그만큼 달러 조달 수요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전 세계적으로 달러 자금 경색이 심화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다. 여기에는 러시아가 달러 단기시장의 주요 공급처 역할을 해왔었단 점도 한몫하는 분위기다. 금융제재로 러시아의 달러 자금 공급이 막히면서 글로벌 달러 경색이 더 심화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 은행들의 뱅크런에 이어 연쇄 디폴트가 나올 경우 전 세계적인 달러 유동성 위기도 배제할 수 없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만, 서방과 러시아 간 금융전쟁의 끝이 어디일지 지금은 가늠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달러 유동성 위기만으로도 전 세계 금융시장은 초토화될 수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또 한번 긴축을 미루고 막대한 달러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연준의 금리인상 지연과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당장은 시장의 안정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반대급부인 초(超)인플레이션에 따른 후폭풍은 결국 더 세게 불어닥칠 것이다.

가장 좋은 건 러시아의 후퇴 시나리오다. 이게 아니라면, 그리고 서방의 제재가 완화할 기미가 없다면 금융위기에 준하는 달러 유동성 위기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야 한다.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은 정크본드 수준을 넘어 디폴트 위험을 반영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러시아의 디폴트에 이은 글로벌 위기 상황은 이제 정부당국과 한국은행, 금융권,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불어닥친 현실이다. 우리 금융시장에 미치는 파장이 아직 크지 않다고 해서 안심해선 안 될 일이다. (금융시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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