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막 50세를 넘겼을 때는 인도중앙은행(RBI) 총재로 발탁됐다. 명성에 걸맞게 총재 재임 중 물가 관리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음에도 3년 만에 물러났다. RBI 총재 임기는 3년이지만, 전임 총재는 거의 예외 없이 첫 3년 후 2년간 임기가 연장됐다. 사실상의 경질이다.
라잔의 조기 퇴진에는 정권 교체기라는 배경이 맞물려 있다. 라잔은 만모한 싱 총리 내각에서 총재로 임명됐다. 심각한 물가 급등기에 취임한 라잔 총재는 취임 직후에 인플레이션 목표제를 도입했다. 이후 세 차례 기준금리를 올리며 물가를 잡는 동시에 인도 루피화 가치의 추락을 막는 데도 성공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라잔 총재와의 마찰이 잦아졌다. 새 정부는 빠른 성장을 위해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했으나 물가 안정에 방점을 둔 라잔 총재가 이를 거부하며 정면충돌하는 모양새가 됐다. RBI가 뒤늦게 금리 인하에 나섰지만, 인하 속도가 경기 활성화를 바라는 모디 내각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라잔 총재는 연임을 포기하고 시카고대로 복귀했다.
국내 금융권에서 부쩍 이런 라구람 라잔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라잔 전 총재와 시기적이나 성향에서나 미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어 우려된다는 게 요지다.
이 후보자는 국내 대표적인 스타 경제학자다. 미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아 서울대 교수,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 IMF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 등을 거치면서 명성을 쌓아왔다. 초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차관급 공직생활도 했다.
이 후보자가 정권 교체 직전에 지명됐다는 점도 내내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달 중 인사청문회를 거쳐 총재 임명 자체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앞으로 4년의 임기 대부분은 새 정부와 발을 맞춰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이 후보자를 지명했을 때 윤석열 당선인 측에서 나온 싸늘한 반응은 순탄치 않은 길을 예고한 것일 수 있다.
물가 급등기 한은의 추가 기준금리 인상은 불가피한 수순이다. 새 정부도 초기에는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지만, 언제까지 감내할 수 있을지는 장담이 어렵다. 국채 금리 커브도 이미 경기 침체를 예고하는 상황에서 금리 인상기가 길어지거나 그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원치 않을 수 있다. 일정 시점이 되면 새 정부의 목표는 경제 살리기에 맞춰질 게 자명한 데, 한은의 역할론이 부각되면 그 자체로 큰 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석학의 자존심이 더해진 이 후보자의 타협 없는 원칙론이 발동할 경우엔 정부와 갈등이 깊어질 여지도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국내 물가가 얼마나 빨리 잡힐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라잔 전 RBI 총재 사례는 인도 정치와 경제 메커니즘의 후진성에서 발현된 측면이 크다. 이 후보자의 거취에 대한 압박 등 극단적인 상황은 연출되지 않을 거라 본다. 하지만 정권 교체기라는 특수성, 물가 급등기, 새 정부의 경제 활성화 프로젝트 등이 맞물리며 한은과 이 후보자 입장에선 고난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 새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에 한은의 독립성이 크게 흔들릴 가능성을 미리 경계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 이전에 집중됐던 청와대 주재 서별관회의와 열석발언권(기획재정부 차관 등이 금통위 회의에 참석해 발언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척하면 척"이라는 경제 부총리 발언까지. 새 정부의 등장과 함께 과거 한은의 독립성을 뒤흔들었던 시그니처 단어들이 부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취재본부 금융시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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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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