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전후 국내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 1위 기업은 한국전력이었다. 1989년 5월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이어 '국민주 2호' 타이틀을 달고 공모를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상장한 한전은 국민주라는 기대 속에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했다. 한국거래소가 증시에 입성한 기업들을 상대로 시가총액 순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5년부터 한전은 압도적으로 1위였다. 당시 한전의 시가총액은 18조9천억원으로 '국민주 1호' 포항제철(4조8천억원)과 삼성전자(7조7천억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1998년까지 1위 자리를 지키던 한전은 내리막을 탄다. 2009년까지 2~5위를 오가던 한전의 시가총액 순위는 2010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2010년대 다시 10위권에 들어서기도 했지만, 2020년 이후 20위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 됐다. 지난 4일 기준 한전 주가는 2만2천950원이었다. 30년 넘게 한전 주식을 들고 있었다면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할 때 사실상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1989년 당시 한전의 일반 청약 공모가는 1만3천원이었다.

한전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민영 주주가 있는 기업이긴 해도, 여전히 51%의 지분을 들고 있는 정부가 대주주인 공공기관이다. 특히 한전은 전기사업법상 전기판매와 송배전망 독점사업자라는 지위를 갖는다. '공공'과 '독점'이라는 묘한 지위 덕에 한전은 안정적 투자 수단으로 여겨졌다. 공공기관이 수익을 내기 위한 목적의 기관이 아님에도 독점적 사업자라는 지위가 이를 상쇄할 수 있었다. 특히 정부가 손실을 보충하고 보증해 줄 것이란 기대는 매력도를 높여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에너지 대전환의 시대 도래와 그에 따라 커진 정책 변화의 불확실성은 한전이라는 기업에 대한 시각 변화를 동반한다.

한전이 지난해 낸 적자 규모는 무려 5조8천601억원에 달했다. 그런데 지난해 전체 적자에 맞먹는 규모의 적자를 올해 1분기에 낼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전체 적자 규모는 2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대규모 적자는 사실 예견된 것이다. 비싸게 전기를 사와 저렴하게 파는 데 적자가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한전은 6개 발전자회사와 민간 발전사업자들이 생산한 전기를 도매가격인 계통한계가격(SMP)으로 매입한다. 이렇게 사들인 전기를 송전망을 통해 소매가로 소비자들에 공급한다. 그런데 지난해 이후 국제유가와 액화천연가스(LNG) 등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발전원의 가격은 꾸준히 오름세다.

발전사업자들은 원재료 가격 상승을 SMP에 반영해 한전에 전기를 판다. 작년 1월 kWh(킬로와트시)당 70.65원이던 가중평균 SMP는 같은 해 12월 142.81원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여기서 미스매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전은 발전사업자들로부터 원재료 가격 상승이 반영된 높은 가격에 전기를 사 오지만, 소비자들에게는 이를 제대로 반영한 가격이 아닌 낮은 가격에 팔 수밖에 없었다. 전기를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전은 전기를 사와 판매하는 사업자이긴 하지만 사실상 가격 결정권은 정부가 쥐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 국민 가운데 하루라도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국민은 없다. 원재료 가격이 올랐다고 상품인 전기요금을 무작정 올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기를 완전한 공공재로 보는 시각 때문이기도 하다. 한전은 끊임없이 전기요금 인상을 요구하지만, 정부는 쉽사리 가격 인상을 결정하지 못한다. 다음 주 공식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 또한 마찬가지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달 28일 전기요금에 '원가주의' 원칙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원칙대로라면 전기요금은 대폭 오르게 된다. 하지만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과연 새 정부가 전기요금 조정에 나설 수 있을까. 결국은 한전의 의지가 아니라 정부의 의사결정에 따라 전기요금이 결정되는 구조는 달라질 게 없다.

문제는 한전의 적자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지다. 원가주의 원칙 강화가 됐건, 이미 사문화된 연료비 연동제를 정상화하는 것이 됐건, 과거 총괄 원가 산정방식을 회복시키는 것이 됐건 전기요금 인상은 불가피하다. 그래야 한전의 적자를 메울 수 있다. 그런 게 없다면 사실 해결 방법은 없다. 새 정부가 한전의 손실을 메워주기 위해 자본확충에 나설 가능성도 현재로선 없어 보인다. 정부의 대주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주주배정 증자를 해야 하지만, 민간 주주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윤석열 정부는 공공기관들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구조조정을 통해 불용자산을 팔고, 인력을 줄인다고 한전의 적자가 메워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해결될 문제였다면 벌써 하지 않았을까.

이같은 '한전 딜레마'를 고스란히 채권시장이 감내하고 있다. 한전이 올해 4월까지 발행한 회사채는 12조원을 넘어섰다. 이는 지난해 총 발행 규모 10조4천300억원을 넘어선 것이다. 2020년의 3조4천200억원과 비교하면 3배를 웃돈다. 현재와 같은 적자 구조가 지속한다면 회사채 발행 규모는 올해만 2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신용등급 'AAA'와 '정부 보증'이라는 요술방망이만 없다면 사실 불가능한 규모다. 한전은 내년 이후에도 매년 4조~5조원의 회사채 차환에 나서야 한다. 차환 수요에 더해 투자와 운영비 마련을 위한 회사채도 찍어야 한다. 금리는 무서운 속도로 오르고 있다. 적자는 누적돼 가는데 이자 비용도 기하급수로 커진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기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쿰파니스는 라틴어로 '함께(cum)'와 '빵(panis)'이 합쳐진 말로 동료나 친구를 뜻하는 컴패니언(Companion),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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