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인플레 파이터'로 꼽히는 인물은 폴 볼커 전 연준(Fed) 의장이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민주당의 지미 카터 정부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를 관통하며 전 세계 통화정책을 주물렀던 볼커는 논쟁적 인물이기도 하다. 연준 의장에 올랐을 때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무려 14.6%에 달했다. 초인플레이션을 잠재울 수단은 금리 인상밖에 없었다. 1979년 7월 10.5%였던 미 기준금리는 채 1년도 안 돼 17.6%까지 치솟았고, 2년 뒤에는 19%를 넘어섰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한바탕 치르고 난 뒤 미 소비자물가지수는 4% 밑으로 뚝 떨어졌다. 급격한 금리 인상에 경기가 둔화하면서 볼커를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지만, 결국 1980년대 미국 경제 호황의 밑거름이 됐다는 반대의 평가도 있다.

현재 미국의 통화정책 수장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다. 파월은 존경하는 인물로 볼커를 꼽는다. 볼커는 원칙에 충실했던 전형적인 미국의 공무원이었다는 게 파월의 평가다. 볼커가 급격한 금리 인상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잡았던 40년 전처럼 파월도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자이언트 스텝'을 통해 전 세계 금융시장에 강한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초인플레이션을 잡고,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험성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유일한 처방은 빠르고 높은 수준의 금리 인상이다. 이러한 조치는 금리가 가장 강력한 '권력'임을 새삼 입증하고 있다. 미 연준과 파월이 내뱉는 말들은 가히 '공포'가 되고 있다. 파월은 앞으로도 볼커의 길을 계속 따르겠다고 공언한다. 금리라는 가공할 수단을 쥔 미 연준과 파월의 입에 따라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전 세계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은 흔들릴 것이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 연준이 28년 만에 기준금리를 한 번에 75bp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에 나서면서 파월이 내뱉은 말이 눈길을 끈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과정에서 고통을 수반할 수 있다고 경고한 파월은 "당분간 집을 사지 말라"고 했다. 통화정책 방향을 설명하면서 부동산 시장을 언급한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인플레이션이 낮아지고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는 가급적 집을 살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조언이자 경고였다.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높아지고 경기둔화가 이어질 공산이 큰 상황에서 자산 가격도 급락할 수 있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혹한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파월은 경기둔화가 아닌 물가 잡기 실패를 연준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책이라고 했다. 물가가 잡히기 전까지는 자이언트 스텝 이상의 조치를 계속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은 우리 일상에서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미 연준을 쫓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도 금리 인상의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채권시장과 자산시장에서는 이미 그 이상으로 반영되고 있다. 주식시장은 고점 대비 30% 이상 급락했고, 가상화폐 시장마저 폭락의 연속이다. 파월의 경고처럼 국내 부동산 시장도 냉각하기 시작했다. 주택 매수심리는 움츠러들기 시작했고, 가격은 조정 국면으로 들어섰다. 부동산 시장이 다른 자산시장에 비해 가격 반영 정도가 더딘 측면이 있지만, 현재의 조정 상황을 보면 이미 가격의 방향성은 바뀌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매도와 매수 가격 갭(호가 차이)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 가격 형성은 사실상 마비됐다. 쉽게 말해 팔려는 사람보다 사려는 사람들이 더 위축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유는 하나다. 고금리다. 주택담보대출이 이미 7%대를 넘어선 상황에서 늘어난 금융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용감해질 매수자는 많지 않다. 매도자가 가격을 낮추지 않는 이상 쉽사리 매수심리가 살아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렇듯 가격이 아래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는 여럿 있다. 미분양 물량이다. 나오기만 하면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는 서울의 분양시장에서도 미분양 물량이 쌓이고 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 자료에 따르면 서울의 5월 미분양 물량은 688가구였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부동산 시장이 냉각됐던 지난 2007년의 704가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청약 열기가 뜨거웠던 수년 전과 비교하면 10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다. 전국적으로 미분양 규모는 2만7천 가구(4월 말 기준) 수준이다. 전월보다 소폭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방을 중심으로 증가 추이를 보인다. 미분양 사태로 부동산 시장과 건설업계가 출렁였던 2007~2008년 상황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로 볼 수도 있지만, 추이는 심상치 않다. 2007년 말 전국 미분양 물량은 11만여 가구였지만 1년 새 역대 최대인 16만여 가구로 폭증한 바 있다.

정부에서 집 살 여력을 확대해 주기 위해 생애 최초 매수자에게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80%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금리가 급격하게 오르는 상황에서 매수세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샀던 젊은 세대들의 집 구매 의사는 급격히 식어가고 있다. 끌어모을 돈도 없을뿐더러 현재 소득 수준으로 고점을 찍은 집을 살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점 부근에서 집을 샀던 영끌족들은 금리 인상에 퇴로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금리는 오르고 집값은 내려가는 상황을 맞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이미 현실이 돼 가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가격의 방향과는 좀 다른 정책들만 계속 내놓고 있다. 잠재적 주택 구매자들의 편의를 봐주는 차원에서는 필요하겠지만, 금리가 가장 강력한 권력이 된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백약이 무효다. 팔려는 사람도 사려는 사람도 가격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정책이 가격을 선도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니다. 금리에 따른 고통을 덜어주고 연착륙할 수 있는 세밀한 정책 조율이 필요하다. 대선 때 내놨던 공약들도 다시 선별해 조정해야 한다. 공약을 모두 지키면 좋겠지만, 고통을 가중하는 정책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전 정부가 27번에 이르는 정책을 발표했음에도 부동산 시장이 엇나간 이유를 알아야 한다.



(기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쿰파니스는 라틴어로 '함께(cum)'와 '빵(panis)'이 합쳐진 말로 동료나 친구를 뜻하는 컴패니언(Companion),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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