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삼성전자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들은 매년 말이 되면 PC와 모바일, 서버 등 고객사들을 상대로 '떨이 판매'에 들어간다. 이를 '스페셜 딜'(Special Deal)이라고 한다. 반도체 제조사들은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고객사에 넘기는 물량 이상 일정 수준의 재고를 유지한다. 그러다 연말이 되면 가격을 낮춰 일단 재고를 털고 해를 넘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도체 가격은 전반적으로 하락한다. 그렇게 재고가 풀리고 새로운 거래가 형성되면 다시 오르는 추세를 보인다. 하지만 올 연말과 내년 초에는 이러한 기존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떨이 판매를 하기에는 재고가 너무나도 많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이를 모두 받아줄 고객사가 있다면 모를까. 고객사들은 이미 주문을 줄이기 시작했다. 내년 이후 경기가 어찌 될 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건을 더 사들여 쟁여두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적정 수준 이상으로 쌓인 재고를 팔기 위한 반도체 제조사들의 피를 말리는 전쟁이 시작됐다. 가격은 더 내려갈 것이다. 원가 이상으로만 팔 수 있다면 다행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렇게 반도체 시장의 겨울이 빨리 찾아왔다.

삼성전자가 올해 반기보고서에 적시한 상반기 기준 재고자산은 무려 52조922억원에 달했다. 50조원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무려 20조원 가까이 늘어난 것이라 충격은 컸다. 재고를 털어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지표화한 재고자산회전율은 작년에는 47.19일이었지만, 올해 1분기에는 52.19일로 5일 늘어났고, 올해 2분기에는 58.91일로 더 늘었다. 반년 사이에 11.72일이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수요가 죽고 있다는 얘기다. 재고가 팔리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삼성전자가 쌓은 충당금 규모만 2조9천701억원에 달했다. 이는 작년 말의 1조8천930억원에 견줘 1조원 이상 늘어난 수치다.

재고가 쌓이면 당연히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가전, 스마트폰 등의 공장을 돌린다. 스마트폰 공장 가동률은 작년 말 81%대에서 올해 2분기에는 70%대로 떨어졌다. 가전 공장의 가동률도 같은 기간 81%대에서 63%대로 하락했다. 하지만 반도체 공장은 한순간도 멈출 수 없다. 전기가 단 1초라도 끊기면 공장 자체가 셧다운 되고 회복하는 데까지 수개월이 걸린다. 다시 말해 재고가 쌓여도 반도체는 계속 찍어내야 한다. 가동률이 100%인 이유다. 수요가 줄면서 판매가 줄고 재고는 쌓이지만, 반도체 공장을 계속 굴러가게 해야 하는 딜레마의 연속이다.

최근 반도체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삼성전자 등 제조사가 고객사와 거래할 때 적용하는 일종의 도매가격인 고정거래가격이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시장조사기관인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범용제품인 DDR4 8GB의 고정거래 가격은 2.85달러로 한 달 전보다 1.04% 하락했다. 제조사와 고객사가 통상 분기 단위로 계약을 하는 점을 고려할 때 고정거래가격이 한 달 사이에 이처럼 떨어졌다는 것은 제조사에 상당한 위험 신호다. 제품을 팔수록 평가손이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시장의 통상적인 관행을 깨고 일부에서는 월 단위 계약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최대한 재고를 털어내려는 제조사들의 눈물겨운 사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사례다.

증시 기관투자자들이 지난달에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을 무려 1조6천억원 어치 팔아치운 것도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측하기 때문이 아닐까. 반도체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20%를 차지하는 효자 품목이다. 하지만 지난 8월 반도체 수출은 26개월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물론 반도체 수출 규모가 여전히 100억달러를 넘어서면서 무역수지 적자 규모를 더 늘리지 않게 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반도체 재고를 털어내고 정상화하는 데까지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 정도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사이 단가가 더 떨어질 수도 있다. 반도체 수출 절대액도 축소될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무역수지 적자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 반도체 최대 고객인 중국(홍콩 포함 수출액의 60%)이 반도체 제조 기술력을 높이면서 우리와의 격차를 슬금슬금 줄여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경고에도 애플은 중국의 낸드플래시 1위 업체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와 손을 잡았다. 조만간 나올 아이폰 14에는 YMTC가 생산하는 128단 낸드플래시가 장착된다. '반도체 공급망'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의 고래 싸움에 우리나라 반도체 제조사들이 새우로 전락할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양국의 핵심 기술 기업이 손을 잡은 것이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에서 길을 뚫으면서 빠져 나와야 할 상황이다. 2022년 가을과 겨울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엔 최악의 위기의 시기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쉽진 않아 보인다.

(기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쿰파니스는 라틴어로 '함께(cum)'와 '빵(panis)'이 합쳐진 말로 동료나 친구를 뜻하는 컴패니언(Companion),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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