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번복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뒤집을 결정을 왜 했느냐"는 비난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일로 귀결된다. 그러나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집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유연하게 변화해 나가는 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정책당국과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 번복 결정은 '어려웠던' 만큼 칭찬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듯 하다. 한 번 깨진 시장의 신뢰를 당장 되찾는데 역부족이라도, 적어도 시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시장의 반응만 봐도 얼마나 당국과 흥국의 '번복할 용기'가 먹혀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를 보여주는 한국 5년 CDS 프리미엄은 지난 3일 74.98bp로, 최근 5년 동안 가장 높아졌다. 불과 하루 전 70.33bp를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55.25bp로, 이전 수준보다 낮아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입은행의 10년물 달러채 호가는 지난 3일 160bp까지 치솟았다가 현재 125bp 수준으로 내려왔다.

이번 달을 흔들었던 흥국생명 사태는 11월 첫날 시작됐다. 흥국생명이 싱가포르거래소에 일주일 뒤 예정된 5억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시한 게 출발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흥국생명은 물론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국내 보험사 채권 가격이 급락했다. 투매와 맞물려 매수는 없고 매도만 있는 호가가 급증했고, 전례 없는 폭락세가 나타났다. 국내에서 콜옵션 미행사 사례가 13년 만의 일이다 보니 시장의 충격은 컸다.

콜옵션은 신종자본증권과 같은 영구채, 즉 만기가 긴 채권에서는 투자자들에게 조기 상환할 수 있는 암묵적인 만기로 여겨진다. 30년 만기 신종자본증권을 사더라도 5년 또는 10년 뒤 콜옵션 조항이 있다면 이때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시장의 컨센서스다. 그런데 흥국생명이 시장의 관행을 깨고 조기 상환 불가를 선언했고, 당연히 흥국생명, 더 나아가 한국 보험사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의혹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은 한국물(KP)이다. 해외 투자자가 엮여있다 보니 한국을 향한 신용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차이나런'에 가뜩이나 위축됐던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흥국생명 사태까지 더 해지자 KP물을 향한 불안감은 더 커졌다. 이미 10월 시장을 흔들었던 레고랜드 사태로 국내 채권시장은 경색된 상황이었고, 외신을 통해 이 사태가 알려져 한국물 시장 전반에 조달 불안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흥국생명까지 더해지자 CDS가 움직이고, 자칫하면 달러-원 환율까지 흔들 기세였다.

금융위, 금감원의 영역을 넘어 기재부까지 확대될 사안이었다. 사태의 파장이 커지자 흥국생명은 엿새 만에 기존 결정을 번복했다.

유례없는 콜옵션 미행사, 다시 행사까지의 결정은 흥국생명 혼자 하지 않았다. 번복 후 흥국생명이 조기상환에 성공하기까지는 당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음은 명확하다.

당초 흥국생명은 당국과의 협의 하에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흥국생명은 조기상환을 위해 차환 발행을 하고 싶었지만, 없는 시장 수요에서 발행하기 위해서는 금리를 턱없이 높여야 했다. 흥국생명이 발행했던 신종자본증권 금리는 5% 수준. 시장에서 당시 차환 발행을 하려면 12%를 줘야 했다. 차라리 이자를 얹어주는 스텝업 조항에 따라 7% 정도 금리를 올려 제공하는 게 흥국생명 입장에서는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차환 발행이 어렵다면 자본을 활용해야 한다. 2조원의 자본 중 상환액 6천억원이 조달 자본으로 빠지면 건전성 지표인 RBC가 폭락하게 된다. 금융당국은 보험사의 RBC가 150% 수준을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흥국생명의 RBC는 이미 지난 6월 말 기준 157%로 금융당국의 권고치를 턱걸이 하고 있었다. RBC를 유지하려면 상환은 불가능했다. 여기서 당국은 한시적인 유예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 RBC 규제는 킥스라는 새로운 건전성 규제로 인해 내년이면 사라진다. 겨우 두 달 남은 시한부 규제였지만, 당국은 콜옵션 미행사를 경영상의 합리적 결정이라는 데 흥국생명과 교감한다.

엿새 동안 당국은 결자해지를 자처했다. 흥국생명이 발행한 RP를 시중은행이 매입하도록 해 사실상 유동성을 지원했다. 관치금융 비판을 감수한 선택이었다. 대주주가 나서야 할 일을 은행들을 동원해 해결했지만, 어쨌든 시장은 안정됐다.

숨 가쁘게 돌아간 사태가 한숨 돌리자 당국은 콜옵션 미행사 재발 방지를 위해 관리에 고삐를 당겼고 내년 만기가 돌아오는 자본성 증권의 조기상환 여부에 대해 시장과 소통하라고 강조했다. 당국 자체도 외화자금 상황을 날마다 들여다보고 시장과 교감하고 있다.

최근 유럽 시장에서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레고랜드 사태로 촉발된 지금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콜옵션 행사라는 관행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절대 선'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시장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못했고 혼란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흥국생명의 잘못은 명확하다. 또, 당국은 개별 금융회사의 선택이 시장에 미칠 영향을 과소평가했다. 유연하지 못한 규제 정책이 시장 혼란을 가중했다는 비판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미안하게 됐다는 말과 욕먹을, 미움받을 용기를 각오하면서도 철회 결정을 내린 것은 다르다. 시장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내년은 기대도 안 한다. 당장 올해 말까지만이라도 흥국생명 사태 이후 치유된 지금의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한 시장 참여자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것 이상의 설망어검(舌芒於劍: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이다. (투자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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