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월가의 황제'로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적인 투자은행(IB) JP모건을 2005년부터 이끌고 있으니 그런 별칭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다이먼 회장은 18년간 JP모건의 수장으로 있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JP모건에 머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모건스탠리 최고경영자(CEO)인 제임스 고먼 회장은 작년 5월주주총회에서 "곧 물러나지도 않겠지만 죽을 때까지 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고먼 회장은 2010년부터 모건스탠리를 이끌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브라이언 모니한 CEO는 13년째 수장으로 있다.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브랭크파인 전 CEO는 12년 장기 집권을 했다. 최근 미국 월가의 금융사 CEO의 임기가 이전보다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10년을 넘긴 CEO들은 수두룩하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뭘까. 제임스 고먼 회장이 주총에서 한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건강한 승계 전환'을 언급하면서, "1년에 한 번은 이사회와 (승계와 관련해)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CEO에 오르면 2~3년씩 쭉 아무런 장벽 없이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고, 매년 이사회에 승계 관련 사항을 보고하고, 논의 및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경영실적이 우수하고, 내부통제 부실로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지 않는 동시에 조직이나 인사 관련한 잡음만 없다면, 주주와의 소통만 원활하다면 장기 집권은 가능한 구조인 셈이다. 이렇듯 월가에서는 십수년 장기 집권하더라도 '제왕적 CEO'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독립된 이사회가 보증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월가 대부분의 대형 은행의 이사회는 모건스탠리와 같은 승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BoA는 CEO 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CEO가 될 수 있는 잠재 후보군을 사전적으로 관리하고 평가하고, 이사회에도 보고한다. 씨티그룹 역시 상시 후보군 육성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CEO의 임기가 끝나기 최소 1년 전에는 최종 후보군을 확정한다. 이렇게 시차를 두는 이유는 최종 후보군에 오른 인사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준비된 사람'이 CEO가 될 수 있게 하는 셈이다. 미국 최대 은행인 웰스파고 역시 경영진이 매년 이사회에 승계 계획을 보고한다. 갑작스럽게 CEO의 부재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이사회는 계획에 따라 신속하게 후임자를 결정한다. 이사회가 상시로 검증 시스템을 돌리고 있어서다. 월가 은행 상당수의 CEO가 '장기 집권'을 하고 있지만, 늘 그들을 감시·감독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그게 바로 이사회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은행권은 CEO 선임을 둘러싸고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금융당국의 관치금융이 부활했느니, 은행권의 불투명한 CEO 장기 집권 시스템을 바꿔야 하느니 하면서 논란이 불붙었다. 사실 결말은 금융당국의 생각대로 돼 가는 분위기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은행은 공공재"라는 프레임을 던지면서 이젠 지배구조 문제를 본격적으로 건드릴 태세다. 금융위원회는 금융지주사의 지배구조 '선진화'를 명목으로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또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은행권 지배구조 개편 문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계속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오는 단골 주제다. 그런데도 30년 가까이 아직도 똑같은 얘기를 반복한다.

금융당국이 추진하려는 은행권 지배구조 개선 방안의 핵심은 이사회의 독립성과 투명성이다. 사실상 주인이 없는 은행을 특정 CEO가 독점하고, 이사회를 '자기 사람'으로 채워 '제왕적 CEO' 체계를 구축하는 시스템을 막겠다는 취지다. 이러한 기조의 근저에는 "CEO가 연임, 3연임, 심지어는 4연임까지 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특히, 연간 1억 원에 육박하는 연봉을 받는 사외이사들이 '거수기' 역할만 하면서 CEO들과 짬짜미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형성하다 보니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자리하고 있다. CEO를 뽑는 사외이사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올해 주총을 앞두고 5대 금융지주의 사외이사 중 80% 넘게 임기가 만료된다. 물론 연임이 가능한 사외이사들도 있겠지만, 현재의 분위기로는 상당수가 물갈이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은 은행권 이사회 구성이 적정한지, 경영진을 제대로 감시하는 체계가 갖춰졌는지를 두고 실태 점검에 나섰다.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사전 포석인 셈이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긴 하지만 금융당국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놨으면 한다. 그저 정권이 바뀌었으니 사람도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접근한다면 그 결말은 또 과거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 한번 바꿔 보려고 고작 이런 대책을 내놨느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사회의 독립성, 전문성, 다양성을 강화하려는 근원적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이어야 하지만, 경영진에 맞선 사외이사들의 책임도 한층 높여야 한다. 거수기 활동으로 모든 게 면책되는 사외이사들은 무능한 경영진 못지않게 위험하다. 이사회를 경영과 감독으로 이원화해 운영하는 독일의 도이치방크는 경영진의 경영성과에 대해 사외이사들이 동일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주주들로부터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는 대상이 경영진뿐만 아니라 사외이사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IMF 외환위기 전후로 은행 사외이사들이 은행에서 각종 특혜대출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경영진과 사외이사들이 그저 '공동체'라는 의식으로 똘똘 뭉쳐있게 된다면 담배를 피우는 호랑이는 또 나올 수 있다. 제도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선의로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없다.

(정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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