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금융시장을 한때 혼란케 한 '주범'으로 몰렸던 메리츠증권에 대한 당국의 시선이 어느새 따뜻해졌다. 시장에서는 메리츠증권이 롯데건설 지원군을 자처한 점을 그 배경으로 꼽는다.

지난달 메리츠증권은 롯데그룹 전체 유동성 위기 진원지인 롯데건설과 1조5천억 원 규모의 투자 협약을 체결했다. 메리츠증권이 롯데건설 보증부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등의 채권 매입을 위한 자금 마련을 주간했다. 메리츠금융이 선순위로 9천억 원, 롯데그룹이 6천억 원을 출자한 대규모 자금 덕에 롯데건설은 자금시장 경색으로 비롯된 시장이 우려를 해소할 수 있었다. 금융당국은 이런 메리츠의 롯데건설 지원 사례를 수익성과 공공성을 함께 살린 모범 사례로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는 '미운털'이 아니다.

역시 시장 혼란에 '부채'가 있는 한국투자증권은 증권사 가운데 처음으로 신용융자 이자율을 인하했다.

미운털을 벗고자 하는 메리츠증권 사례와 비슷해 보인다. 신용거래융자는 증권사가 개인 투자자에게 주식 매수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증권사 대출로, 신용거래융자 금리는 기업어음(CP)이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등의 기준금리를 책정한 뒤 신용프리미엄, 업무 원가, 목표이익률, 자본비용 등의 가산금리를 더해 결정한다.

최근 안정을 되찾고 있는 금리 시장과 달리 일부 증권사들이 신용융자 이자율을 상향 조정하자, 금융당국은 시장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증권업계 신용융자 이자율의 '정당성'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은행의 돈 잔치'를 연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던 때이기도 하다.

은행권의 대출금리 인하가 이어지고 있어 신용융자 이자율을 올린 일부 증권사를 향한 당국의 눈초리는 더욱 매서워졌다. 국내 29개 증권사에서 벌어들인 신용거래융자 이자수익 역시 연간 1조 원을 돌파한 지 오래다. 일종의 '증권사 돈 잔치'다.

한국투자증권이 이자율 인하에 선제적으로 나서자 삼성증권과 KB증권이 동참했고, 다른 대형 증권사들도 이자율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원했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 흥국생명 콜옵션 사태로 자금시장이 대혼란을 겪었던 지난해 11월, 한 고위 당국자가 "한국투자증권과 옛 메리츠증권이 지금의 시장을 만들었다"고 꼬집었던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현재는 두 증권사가 당국의 '코드'를 가장 잘 맞추고 있는 곳이 됐다.






저축은행 사태 이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 주도권은 증권사로 넘어갔고 그 중심에는 두 증권사가 있었다. 메리츠증권은 부동산 경기 회복과 함께 물꼬가 다시 트기 시작한 부동산 PF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했다. 당시 중소형사였던 메리츠증권이 조금은 위험한 PF 물건을 취급하며 가능성을 확인하자, 한국투자증권은 대형사라는 강점을 내세워 재빨리 가세했다. 초기 시장을 선점한 두 증권사는 수익성이 높은 좋은 물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증권사들의 부동산 PF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자 중소형사들도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꺾일 것 같지 않았던 부동산 경기는 위험을 많이 감수해야 하는 물건까지도 증권사들에 의해 소화됐다.

'부동산 파티'가 끝나가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레고랜드 사태가 터지자, 부풀어 올랐던 부동산 PF의 거품은 터져버렸다. 뇌관은 여러 증권사를 향했고, 자기자본, 이익 규모 등 체력이 약한 중소형 증권사를 덮쳤다.

그런데 어떤 ABCP에서 터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속에서도 대형 증권사들은 잘 살아남았다. 일부에서는 대형 증권사만 할 수 있는 증권사 발행어음에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발행어음을 통해 손쉽게 확보된 단기 자금도 꼬리표가 없는 돈인 만큼 어디로 흘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업금융에 우선 사용되도록 유도하겠다는 금융당국의 의도와 달리 PF 등 더 큰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는 시장으로 상당 부분 흘러갔다는 게, 시장의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다.

이 발행어음 시장은 과거 종금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던 메리츠증권이 키웠다. 2016년 금융당국이 종합금융투자사업자에 발행어음 업무를 허용한 뒤 이 라이선스를 처음으로 획득한 곳은 2017년 11월 한국투자증권이다.

오히려 위기는 기회라며 위축된 PF 시장에서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이어가는 곳도 있다. 무너진 중소형 증권사의 PF 인력은 단체로 이동해 기회를 다시 찾고 있다.

부동산 PF가 활황일 때 증권사들이 공개하는 고액연봉자 '톱5'의 상당수는 PF 인력들이었다. "같은 층에 근무하면서도 PF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는 증권사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PF의 일부는 연간 20억 원 정도를 거뜬히 보수로 받아 갔다. 그들이 화려한 성과급 잔치를 벌인 대가는 국내 단기자금시장, 금융시장 등 다른 곳이 치렀다. 치솟은 조달 비용과 달러-원 환율, 증발한 증시 시가총액 등 국가가 치른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요즘 금융권 고액 연봉, 성과급이 화두다. 당국은 은행에 이어 성과급 잔치를 벌인 보험, 카드사, 부동산 PF로 엄청난 성과급을 가져간 증권사에도 칼을 빼 들었다.

하루 이틀 된 건 아니다. 성과주의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면 직원들의 사기 진작, 기업의 체질 개선 등 많은 이점을 가져다 댈 수도 있다. 미래의 암울을 알면서도 당장 자기 앞에 떨어질 것만 생각하고 사업을 펼쳤다면, 그 또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돈 잔치'는 아니었다고 업계는 항변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증권·보험·카드 등 금융권은 당국이 허가해준 데만 누릴 수 있는 라이선스 산업이라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시대 육의전은 '금난전권(난전을 금지하는 권리)'을 갖는 대신 나라에 국역을 졌다. 지금의 금융권에도 국역을 지워야 하지 않을까. 봉건시대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투자금융부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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