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른바 '레고랜드 광풍'이 몰아쳤을 때 시장은 일부 국내 대기업의 연쇄 디폴트까지 걱정했다. 시장 금리와 주가는 최악의 상황까지 반영하듯 속절없이 밀렸다. 설(說)이 설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시중 자금마저 얼어붙었다. 시장에서 본의 아니게 블랙 리스트에 오른 해당 기업들은 돈줄을 찾아 온몸으로 뛰었다. '자금난' 석 자도 기사화하기 어려웠던 분위기로 기억한다. 기사 한 꼭지, 한 단락이 단숨에 기업을 무너뜨리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출처:연합뉴스 자료사진(모멘트)

 


시장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이렇게 무섭다. 심리가 취약해질 때는 더 그렇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사례다. 당시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금융위기의 시작이 아니라 피날레에 가까웠다. 위기의 시작은 서브프라임모기지를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몇 개'의 채무불이행이었다. 이후 유사한 상품들이 잇따라 청산됐고 흉흉한 소문이 재생산되며 심리가 악화했다. 투자회사는 지갑을 닫았고, 금융회사는 돈을 거둬들였다. 돈줄이 마르면서 관련 기업과 비은행 금융기관, 심지어 리먼브러더스 등 투자은행의 연쇄 디폴트로까지 이어졌다. 서브프라임이라는 특정 섹터의 위기가 글로벌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한 셈이다.

레고랜드 ABCP 사태가 시장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도 금융위기의 전개 과정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레고랜드 사태는 시장 불안정의 촉매가 됐다. 우리 금융시장의 구조적 취약성이었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을 뒤흔드는 계기가 됐고, 이 때문에 단기자금시장은 빠르게 얼어붙었다. 부동산 PF의 고리에 엮인 건설회사, 관련 대출을 한 금융회사들이 1차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대기업 계열 건설사인 롯데건설의 자금난은 특히 시장의 우려를 키운 셈이 됐다. 롯데 계열 전체로 유동성 위기설이 확산했기 때문이다. 재계 순위 5위 롯데그룹의 자금 경색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비상걸린 건설업계 자금조달
[출처:연합뉴스 자료사진]

 


롯데건설의 2022 회계연도 사업보고서를 보면 절체절명의 당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롯데건설은 사업보고서에서 "2022년 10월 레고랜드 사태 이후 악화한 단기금융시장의 영향으로 회사가 자금보충약정을 제공한 특수목적법인이 발행한 ABCP채권이 금융시장을 통한 연장이 불가했다"고 전했다. 이에 롯데건설은 약 3조원을 투입해 자사가 보증을 선 ABCP를 매입했다. 롯데건설은 추가로 2천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그룹의 전방위적인 지원도 이어졌다. 롯데케미칼과 롯데정밀화학, 롯데홈쇼핑 등 그룹 관계사들은 롯데건설에 1조원이 넘는 자금을 빌려줬다. 올해 초에는 메리츠금융이 1조5천억원의 ABCP를 매입하면서 롯데건설의 유동성에 다소 숨통이 트였다. 그룹의 전방위적인 지원, 그리고 그룹 지원을 담보로 한 금융권의 신용 라인이 없었다면 롯데건설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롯데건설과 그룹 계열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이제 우려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일단 롯데건설의 재무 건전성이 크게 좋아졌다. 상반기 기준 롯데건설의 현금성자산은 1조9천여억원으로 작년 말보다 세 배 이상 증가했다. 부채비율도 36%포인트나 낮췄다. 혹시 모를 유동성 위기에 대비해 유가증권 매각 등으로 현금 보유를 늘린 영향이다. 건설 업황의 일부 회복도 재무 개선에 도움을 줬다.

유동성 위기 때마다 저승사자로 변신하는 신용평가사의 평가도 한결 나아졌다. 두어 달 전만 해도 롯데그룹 주요 계열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했던 신평사들은 최근 롯데의 재무 리스크가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국기업평가는 지난달 말 웹세미나에서 롯데그룹에 재무 부담을 안겼던 롯데건설의 재무 리스크가 상당 수준 완화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롯데건설의 재무 부담이 타 계열사로 전이될 가능성도 제한적이라고 했다.

올해 초까지 지속됐던 기업들의 유동성 리스크가 한풀 꺾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행인 건 숱한 유동성 위기를 거치면서 시장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경험칙'이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시장을 지배할 때일수록 자기실현적 예언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이 시장 스스로의 자정에 한몫하고 있단 얘기다.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 사태가 '진짜 위기'로 확산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취재보도본부 기업금융부장)

ch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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