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의 만남은 늘 언론에 좋은 뉴스거리다.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지 시장은 귀를 쫑긋 세운다. 혹여나 민감한 경제 현안에 대한 언급이라도 나오면 시장이 요동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경제수장의 만남이 잦지 않았기에 생기는 일들이기도 하다.

마지막 회의 주재에 박수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14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참석자들이 마지막으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주재한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왼쪽부터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주현 금융위원장. 2023.12.14 hihong@yna.co.kr

 

사실 기획재정부와 한은의 사이가 좋았던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히 자존심 대결 때문만은 아니다. 통화정책에 대한 독립성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때론 한은의 목적과 기능, 권한 등을 두고 첨예한 갈등을 벌이기도 했다. 금리 수준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 기재부 차관이 참석해 의견을 개진하는 열석발언권을 두고서는 직접 충돌하기도 했다. 한은 직원들이 '정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말을 왜 그토록 싫어하는지는 과거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과거 한은 총재 중 경제부총리를 가장 많이 만났던 사람은 이주열 전 총재였다. 이 전 총재는 4년간 재임하면서 '무려' 10번이나 경제부총리를 만났다. 역대 한은 총재 가운데 최대였다고 한다. 현오석(1번), 최경환(3번), 유일호(2번), 김동연(4번) 등 만남의 대상도 4명이나 됐다. 항상 좋은 소리만 들은 것은 아니다. 정부가 한은 총재를 만나 통화정책에 개입하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늘 두 수장의 만남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박승 전 총재는 임기 중에 경제부총리와 6번 만났고, 이성태 전 총재는 5번의 만남을 가졌다. 김중수 전 총재는 3번만 만났다. 만남 이후에는 늘 '정책 공조'라는 말로 정리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비밀에 부쳐진다. 말 한마디 한마디의 민감성과 휘발성 때문이다. 오랜 기간 만남이 없다면 '엇박자'라는 말이 슬금슬금 나온다. 만나도 뭐라하고, 안 만나도 뭐라하는 참으로 기구한 관계다.


하지만 과거의 사례들은 이제 역사의 캐비넷으로 들어가게 됐다. 역대 최대 만남 기록을 가졌던 이주열 전 총재의 사례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상황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추경호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은 총재는 외부 행사 등에서의 공식·비공식 만남을 빼고서도 매주 회의를 통해서만 60여 차례나 만났다. 매주 명동 은행회관에서 비공개로 열리는 경제협의체인 소위 'F4 회의'를 통해서다. 작년 가을 이후 지금까지 해외 출장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아녔다면 거의 빠짐없이 매주 일요일에 대면한 셈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한은의 독립성이 침해됐다거나 정부가 통화정책에 개입하려 한다는 등의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F4 회의를 경제부총리가 주재하고, 대통령실에서 경제수석까지 참석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지난해 소위 '레고랜드 사태'를 계기로 만들어진 F4 회의는 지난 1년여 동안 금융시장 안정에 크게 기여한 게 사실이다. 다소간의 미비점도 간혹 있긴 했지만, 성과가 논란을 덮은 참 희귀한 케이스다. 이젠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돼 버렸다.

회의에 참석하는 경제부총리와 한은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의 '캐릭터'가 매우 다르다는 점도 롱런의 비결이다. 추경호 부총리는 '경청형', 이창용 총재는 '강의형', 김주현 위원장은 '신중형', 이복현 원장은 '달변형'이다. 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이창용 총재라고 한다. 자신과 한은의 입장과 의견을 가감없이 전달한다고 한다. 이창용 총재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힘을 모아 "회의 좀 그만합시다"라고 소심한 반란을 꿈꾸기도 했다. 그만큼 격의 없는 소통이 이뤄진다. 때론 격론을 벌이면서 싸움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한은 총재가 단순히 정부 측 의견만 듣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 출마를 위해 물러나게 되는 추경호 부총리는 지난 14일 마지막 회의를 주재했다. '반란 세력들'을 물리치고 1년 넘게 회의를 끈질기게 이어온 뚝심은 인정해 줄만 하다. 본인이 직접 작명한 F4 회의를 자신의 '브랜드'로 만들었으니 애착도 컸을 것이다. 마지막 회의에서 이창용 총재가 박수받아 마땅하다고 호평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추 부총리가 떠나면 또 다른 회의 멤버였던 최상목 경제부총리 후보자(전 경제수석)가 온다.

금융시장이 크게 안정되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돌출 변수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드디어 '피벗'을 선언하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시장 상황이 호전될 것이란 기대는 경계해야 한다. 시계제로의 불확실한 요인만 아주 조금 제거됐을 뿐이다. 고금리 상황 속에서 한계치를 드러낸 기업과 금융사를 상대로 한 구조조정도 슬슬 시작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금융시장은 또 출렁일 수 있다. 돈의 크기와 흐름을 제어할 수 있으려면 다양한 소스의 정보와 데이터가 한 곳으로 집중돼야 한다. 앞으로도 F4 회의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정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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