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SK그룹 측의 실수인 줄 알았다. 연초 최태원 회장의 SK하이닉스 공장 현장방문 기사에 올라온 한장의 사진을 보고 든 생각이다. 사진 속 최 회장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있지만, 음영 처리돼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다. 해당 사진을 제공한 SK그룹이 고대역폭메모리(HBM) 웨이퍼란 설명을 단 것을 보고서야 이해가 됐다. 기술 보안을 위한 음영 처리였다. 웨이퍼 사진만으로도 핵심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에서 HBM 웨이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SK그룹 제공]

 


이 사진 한장에 많은 의미가 담겼다. 최 회장이 올해 들어 가장 먼저 찾은 현장이 반도체 공장(이천캠퍼스)이다. 작년에 최 회장의 속을 시커멓게 만들었을, 바로 그 SK하이닉스 공장이다.

그룹의 캐시카우 SK하이닉스가 2022년 4분기부터 4개 분기 동안 10조원 가까운 영업적자를 내는 상황이 오자 그룹 전반에 위기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새해 벽두부터 최 회장이 SK하이닉스 공장을 찾은 것에서 올해는 반도체로 승부를 내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음영 처리된 HBM 웨이퍼 사진은 SK그룹이 다분히 의도한 연출로 보인다. HBM은 SK하이닉스가 업계 1위라고 자신하는 영역이다. 글로벌 HBM 점유율은 작년 기준 대략 6(하이닉스) 대 4(삼성전자) 정도라고 알려진다. 전문가들은 기술력에서도 SK하이닉스가 다소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음영 처리된 웨이퍼 사진은 앞서 있는 기술력의 상징이다. 경쟁사들에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자신감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4' 현장에서도 확인이 된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는 8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에서 '미디어 컨퍼런스'를 가졌다. 2012년 SK그룹에 인수된 이후 가진 첫 단독 기자간담회다. SK하이닉스의 미디어 행사 자체가 이례적이란 의미다. 곽 사장은 "HBM에 있어서는 (SK하이닉스가) 확실한 선두는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
[SK하이닉스 제공]

 


메모리 반도체 전체로는 삼성전자에 이어 만년 2등에 그쳤던 SK하이닉스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수년 내 전체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 제품이다. HBM이 한 개 팔리면 D램은 몇 개에서 수십 개 더 팔리는 구조라 기존의 확장 구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HBM이 D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년 9%에서 올해 19%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 HBM 경쟁의 판도가 매우 중요해진 시점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세계 최대 수요처인 미국 엔비디아에 HBM3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올해 물량까지 선주문을 확보해 추가적인 HBM 설비 증설도 준비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도 조직 정비를 하는 등 바짝 뒤를 쫓고 있지만, 아직 후발주자에 머물러있단 평가다. SK하이닉스는 작년 8월 세계 최초로 5세대 제품인 HBM3E 개발에 성공해 양산을 준비 중이다.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보다 두 달가량 늦은 작년 10월에야 HBM3E 개발을 알렸다.

업계 시각과 달리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삼성전자의 위기감은 크지 않아 보인다. 작년 말에 만난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HBM발 삼성 위기론에 대해 "우리 구성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HBM을 주력으로 두지 않아 선점하지 못한 것이지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곧 따라잡을 수 있다 생각하고, 그 타이밍을 보고 있을 뿐이다."

자신감과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사이 어디쯤에 있는 얘기일까. 올해 말께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이는 HBM 패권 경쟁 2라운드의 결말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취재보도본부 기업금융부장)

ch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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