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 사태의 해결책이 결국 은행들의 '자율배상'으로 가닥이 잡혔다. 은행들은 정기 주주총회를 계기로 새로 구성될 이사회에서 본격 논의를 시작한다. 배상하겠다, 하지 않겠다는 의사결정이 아니다. 배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어느 수준까지 할 것인지를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분쟁조정안'까지 마련해 독려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배짱을 부릴 은행은 없다. 불완전 판매에 대한 제재까지 앞둔 상황에서 은행의 선택지는 별로 없다. 배상 수준을 보고 제재 수위를 고려하겠다는 금융당국의 입장까지 나왔으니 말이 자율배상이지 사실상 '의무'가 돼 버렸다.

홍콩지수 ELS 피해자 기자회견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이복현 금감원장과 은행연합회 회동이 열린 18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관 앞에서 홍콩지수 ELS 피해자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4.3.18 jieunlee@yna.co.kr

고객을 기만하고, 설명의무를 해태해 상품을 팔았다면 제재받고, 손실의 일정 수준을 물어주는 것은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은 물론 법치주의에도 부합한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큰 고난도 상품을 팔 때 은행이 더 성실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강력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도 그래서다. 물론 종잣돈을 더 크게 불리는 데만 온통 관심이 쏠린 투자자들은 각종 리스크와 투자 손실 시 발생할 수 있는 책임 문제 등에 대한 은행의 장황한 설명이 귀찮을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형식적 설명과 형식적 서명 절차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완전 판매인지 불완전 판매인지를 구분하기 모호한 상황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마련한 분쟁조정안이 일률적 비율로 결정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그러한 점이 고려된 측면이 있다. 은행이 전적으로 잘못했다면 손실분의 100%를 물어줘야 하고, 투자자가 전적으로 잘못한 것이라면 단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일견 합리적일 수도 있다. 은행과 투자자의 잘잘못을 따져 배상 비율을 매트릭스화 한 것도 고민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일 뿐 가급적 덜 주려는 은행과 더 받으려는 투자자가 바라보는 지향점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은행이 자율배상에 나서겠다고 결정하더라도 시끄러운 상황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최선의 경우는 양측이 합의해 배상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로 가고, 그것마저 여의찮다면 민사 법원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은행과 투자자 간 눈높이를 맞춰가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지난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고 분쟁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큰 틀의 방향이 정해졌으니 이젠 은행과 투자자들이 풀어야 할 사안이다. 문제는 앞으로는 어찌할 것인가이다. "일회성 이벤트로 문제는 없다". '자율배상으로 은행의 자산건전성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한 답변이다. 여기서 방점은 '문제가 없다'가 아니라 '일회성 이벤트'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또한 은행과 투자자들은 받아들이는 게 다르다. 은행은 과연 일회성일까에, 투자자들은 비슷한 일이 터지면 또 해줄 거라는 데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각자의 이익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공직자들은 간혹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특히 '국민적 관심사', '민생 중심'이라는 말이 개입되면 더 그렇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공직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 또한 시스템 안에서 이뤄져야 정당성이 있다. 금융당국이 이번 사태 초기 "자율배상으로 해결됐으면 한다"고 언급했을 때부터 자율은 사실상 사라졌다. 정부가 언제라도 개입할 수 있다는 시그널만 부각됐을 뿐이다. 상품을 제대로 팔았는지를 전방위로 검사하고 잘못했으면 책임을 물으면 된다. '얼마를 물어줘라, 물어주지 않아도 된다'까지 정해주는 것은 다른 얘기다. 구구절절하게 불가피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뭐 그렇다 치자. 그래도 일회성 이벤트여야 한다. 거대 금융사를 상대로 피해를 본 투자자 입장에선 대항권의 크기가 작을 수 있다. 그런 투자자를 더욱 두텁게 보호해 줄 법적 지원체계를 보강해야 한다. 고난도 상품에 대한 불완전 판매 문제, 판매 채널 제한 등을 두고 금융당국이 후속 대책 마련에 들어간다고 한다. 제도 개선을 위한 작업은 불가피하고 당연한 조치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향후 비슷한 일이 재발했을 때 어떤 원칙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당국의 입장부터 정해야 한다.

(정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10시 32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