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주주총회는 '기업의 청문회'라 불린다. 소액주주들이 의결권을 행사하고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다. 주총을 주주들의 '축제의 장'으로 활용하는 기업들도 있다. 물론 딴 나라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의 주총 문화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우리 사회와 경제가 많은 발전과 변화를 보이는 속에서도 주총 문화는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참 이상한 일이다.

기업들의 주주총회일이 집중되는 것부터 문제다. 정부는 여러 상장사가 같은 날 주총을 열지 않도록 권고하면서 주총 분산 자율준수 프로그램까지 도입했지만,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없다. 올해도 여전히 절반에 가까운 기업이 이른바 '슈퍼 주총 데이'에 주총을 개최한다. 오는 28일에는 700여곳의 주총이 몰렸다. 매년 3월 말에 기업 주총이 중복되다 보니 소액주주들의 의결권 행사를 폭넓게 보장하겠다는 취지는 무색해졌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히는 전자주주총회 도입은 국회 문턱을 넘지도 못했다.

재계 계열사의 주총일이 집중되는 현상도 이전보다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삼성전자는 지난 20일 주총을 열었는데 전자 계열사인 삼성SDI와 삼성전기도 같은 날 주총을 진행했다. 이날 삼성SDS와 삼성카드 등의 주총도 열렸다.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 개최
[연합뉴스 자료사진]

 

주총일 집중 문제는 주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의도적으로 분산시켜 정당한 의결권 행사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과거에는 소액주주의 의결권을 대리한 시민단체의 주총 참여가 활발해지자 이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몰아치기 주총을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시민단체의 주총 참여가 거의 없는 상황인데도, 계열사의 주총일 집중이 반복되는 건 괜한 오해만 살 수 있다.

언론 취재를 제한하려는 재계의 구태도 일부 남아 있다. 주총장 입장을 막더라도 주총 현장은 기자들이 온라인으로나마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기업들이 적잖게 있단 얘기다. 최근에는 '주주 기자'들이 속속 등장하는 이유다. 미리 주식 1주라도 사서 주주 자격으로 주총장에 입장하려는 고육지책이다.

주주가 경영진에 거침없이 질문을 하고, 경영진이 책임감 있게 답변하는 주총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도 있다. 일단 행동주의펀드의 경영 참여나 간섭은 늘었지만, 주총장에서의 활약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행동주의펀드의 공세를 받았던 삼성물산과 금호석유화학 등 주총은 사측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주총 전 공방은 제법 요란했지만, 주총장에선 행동주의펀드의 적극적인 참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2000년대 초중반 삼성전자 주총은 10시간 넘게 진행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소액주주의 의결권을 대리한 시민단체의 공세적인 문제 제기에 따른 마찰이 주된 요인이었지만, 주총 현장에서 소액주주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지만, 가감 없이 전달됐다는 점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023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 참석한 워런 버핏
[연합뉴스 자료사진]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매년 5월 초 미국 네브래스카주 중소도시 오마하로 수만 명의 주주와 애널리스트들을 초청해 정기 주주총회를 연다. 버핏은 사흘 동안 리셉션, 주총, 기자회견을 차례로 개최해 다음 회계연도의 투자 방향을 논의하면서 세계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주총을 주주들의 축제의 장으로 활용하는 셈이다. 국내에선 아직 이런 풍경을 기대하기 어렵다. 기술력이나 실적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한국 기업의 주총 문화는 여전히 개선돼야 할 점이 많다.

그나마 올해 주총에선 일부 변화의 모습도 엿보인다. 삼성전자가 대표이사와 주요 임원들이 총출동해 주총 당일 '주주와의 대화' 시간을 따로 가진 것이나, LG전자가 '열린 주총'을 지향하면서 온라인 생중계와 사전에 받은 주주 질문에 답변한 것 등이 그렇다. LG전자 주총에도 대표이사와 주요 사업본부장들이 자리했다. 이들 기업은 예전에는 대표이사만 주주 질문을 받았다.

국내 대표 기업의 작은 변화가 선순환되면 좋겠지만, 기본적으로 소액주주들의 주주권 행사에 탐탁지 않아 하는 기업들의 속내를 보면 그 행태가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전자주총제 도입과 같은 시스템적 개선을 병행하면서 기업의 의식 자체를 스스로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기업 밸류업의 수단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주주 및 투자자와의 소통 문화 개선이 최고의 밸류업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시장의 조언을 새겨들어야 한다. (취재보도본부 기업금융부장)

ch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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