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정상은 아니죠"

최근 대형 건설사를 중심으로 만기가 5년이 넘는 기업어음(CP)이 대거 발행되고, 구조화상품의 담보채권으로 우량기업의 사모사채가 발행되면서 공모 회사채 발행이 급감하는 등 회사채 시장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자 한 증권사의 기업금융본부장이 건넨 말이다.

지난해 말 최악의 상황을 보낸 회사채 시장은 올들어 미매각 물량이 대폭 줄고 우량 기업들을 중심으로 발행량이 늘면서 훈풍을 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광경들이 속속 나오면서 회사채 시장 참가자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있다.

그간 당연스럽게 공모 회사채 시장을 찾던 기업들이 '다른' 방식으로 대거 자금을 조달하고 있어서다.

대표적인 게 장기물 CP가 대규모로 발행되고 있는 것이다.

GS건설은 지난 달부터 최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무려 만기가 5년, 5년6개월, 6년인 CP를 총 8천400억원어치 발행했다.

건설사들이 만기가 5년 이상인 회사채를 발행하기가 녹록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2009년 2월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CP의 만기제한이 사라지면서 만기 1년을 초과하는 CP들이 가끔 발행되기는 했어도 GS건설 처럼 단기간에 회사채 만기와 맞먹는 장기물로 CP가 발행되는 것은 사실상 거의 처음이다.

삼성물산과 두산중공업도 3년물로 2천억원씩 CP를 발행했고, 대림산업 역시 3년물 CP를 3천억원 어치 발행했다.

이밖에 연합자산관리가 2년물과 3년물로 3천억원의 CP를 발행했고, LG실트론, LG전선, SC금융지주, CJ프레시웨이 등도 만기가 1년 이상인 CP를 발행한 곳들이다.

CP는 상법상 대표이사의 결재만으로도 발행할 수 있을 정도로 발행절차가 간편하다. 증권신고서를 내지 않아도 되고 수요예측과 기업실사 등의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증권사 신탁 등 인수처만 정해지면 순식간에 발행을 완료해 대규모 돈을 확보할 수 있다.

최근 장기물 CP를 발행한 기업들은 회사채 금리 수준 또는 그보다 낮은 금리에 CP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군다나 올해초부터 시행될 것으로 예상됐던 만기 1년 이상의 CP에 대한 증권신고서 제출 부과의무도 5월5일까지 유예됐다.

회사채 시장의 냉기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회사채 시장을 찾지 않고도 기업들이 CP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막바지 기회가 생긴 셈이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대규모 장기물 CP 발행을 촉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연초 CDS(신용부도스와프)와 연계된 구조화상품이 대거 발행되면서 담보채권을 제공하기 위해 우량 기업들이 사모사채가 대거 발행된 것도 회사채 시장의 왜곡 상황을 이끈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그간 꾸준히 회사채로 자금을 조달해 왔던 현대제철(2천억원)과 GS칼텍스(1천억원), 롯데쇼핑(1천억원), LG전자(3천억원) 등 신용등급 'AA'급 기업들이 일제히 사모사채를 발행했다.

특이한 것은 사모사채가 공모 회사채의 민평 금리 보다 낮았다는 것이다.

통상 사모사채는 환금성과 투자수요 기반의 부족함 등을 이유로 금리가 민평금리 보다 높게 발행된다.

증권사의 다른 관계자는 "증권사들이 수익을 낼만한 변변한 사업이 없다 보니 너도나도 구조화금융 부서를 신설, 확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면서 "연초 대규모 사모사채 발행이 일반적인 현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공모 회사채 시장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었다는 점은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우량 기업과 비우량 기업간의 격차가 더욱 확대되고 있는 점도 비정상적 회사채 시장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올들어 수요예측 등에서 미달이 발행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공모 회사채 발행에 나선 기업들이 대부분 우량 기업들이었기에 가능했던 현상이다.

비우량 기업들은 사실상 회사채 발행이 더욱 어려워졌다. 신용등급이 'BBB+' 이하인 기업들은 사실상 공모 회사채를 발행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그간 사실상 사장화됐던 담보부사채 발행이 올들어 크게 늘어난 것도 이러한 점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자기 신용으로는 돈을 빌릴 처지가 못되니 담보를 제공하고서라도 신용도를 올려 돈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시장의 침체 상황이 지속되면서 담보로 제공할 부동산 등의 자산가치가 떨어지고 있어 한계기업들의 담보부사채 발행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공모 회사채 시장이 작년처럼 활기를 띠지 못하면서 회사채 발행 주관과 인수를 담당하는 증권사 DCM(부채자본시장) 관계자들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물량은 줄고, 우량 기업들 위주로만 발행이 이어지다 보니 몇몇 대형 증권사만이 발행 주관과 인수를 주도하면서 증권사 사이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확대되고 있다.

한 증권사의 DCM 담당 임원은 "3∼4개 증권사들만을 위한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점점 더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전했다.

pisces73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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