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권용욱 기자 = 일본 엔화가 미국 달러화 대비 24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일본 경제의 황폐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엔화 약세는 기본적으로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이점이 있지만, 이는 과거 일본이 수출 대국일 때나 통용되던 말로 평가된다.

◇ 역대급 엔저에 고유가 악재까지…日 기업·가계 고난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엔화 약세는 고유가 시기와 겹치며 일본의 무역 수지와 경상 수지, 물가 상승 등에 부정적인 충격을 주는 것으로 진단됐다.

일본 재무성이 이달 발표한 지난 5월 무역통계(속보치)에 따르면 무역수지는 2조3천846억엔의 적자를 기록해 10개월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5월 적자폭은 사상 최대인 지난 2014년 1월(2조7천951억엔) 다음으로 컸다.

일본이 무역 적자에 시달리는 것은 주로 수입 증가 때문이다. 5월 당시에도 고유가와 엔화 약세의 영향으로 수입이 전년대비 48.9%나 늘며 3개월 연속 사상 최대치 기록을 경신했다.

엔화 약세와 연료 및 원자재 비용의 급증 등에 무역적자가 심화하고 있는 셈이다. 무역 적자는 경상 수지 악화로도 이어진다.

과거 엔화 약세는 수출 기업의 호재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증시도 랠리를 보였다.

엔화가 달러 대비 급락한 것은 과거 1998년과 2005년, 2013년 등인데, 아시아 외환위기인 1998년을 제외하고 2005년과 2013년에는 모두 주가가 상승했었다.



달러-엔 환율과 닛케이225의 과거 변동 추이






현지 매체인 닛케이아시아는 "일본은 과거의 수출 강국이 아니다"며 "그렇기 때문에 엔화 약세가 증시에 호재라는 오래된 경험칙은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실제 지난 13일 달러-엔 환율이 24년만에 최고치로 급등할 당시 닛케이 225지수는 전일 대비 3% 이상 빠지며 올해 들어 세 번째로 큰 하락률을 기록했다.

현재 세계무역시장에서 일본의 위치는 지난 1998년, 심지어 마지막 엔화 급락 시기인 2013년과도 매우 달라졌다.

그동안 일본의 많은 생산 거점이 해외로 이전했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일본 제조업체의 해외 생산 비중은 지난 1998 회계연도의 10%에서 2020 회계연도의 20%로 급증했다. 일본은 컴퓨터와 주변기기의 작년 수출 규모는 1998년보다 7천억엔 이상 늘었지만, 수입이 수출액보다 2조엔이 더 많았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세계 수출시장에서 일본의 비중은 지난 1998년 7%에서 2021년 3.4%로 반 토막 났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며 같은 기간 3.3%에서 15.1%로 뛰었다.

골드만삭스의 나오히코 바바 일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자동차 등 여전히 일본에서 생산되는 고부가가치 제품은 엔화 약세일 때도 달러 기준 판매가가 하락하지 않는다"며 "이에 따라 엔화 약세에도 수출량이 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노동력 부족도 문제를 어렵게 한다. 일본의 현재 구직자 1인당 일자리 숫자는 1.27개인데, 이는 지난 2005년과 2013년 각각 1개 미만일 때보다 노동시장이 긴축됐음을 의미한다.

미즈호증권의 고바야시 스케는 "기업들이 엔화 약세에 대응해 국내 생산을 늘리고 싶어도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투자자는 지난 몇 년간 엔화 약세가 더는 수출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켜봤고, 이에 따라 증시의 반응도 달라진 셈이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기술 제품의 수입을 늘리고 있다.

닛케이아시아는 "일본 소비자들은 엔화 약세가 애플 단말기 가격을 끌어올리더라도 저렴한 자국 경쟁사의 모델보다 아이폰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스마트폰과 반도체 같은 제품의 수입이 늘어나고, 수출도 엔화 가치에 더는 반응하지 않으면서 무역 적자는 심화했다"고 꼬집었다.

일본경영인협회가 최근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일본 기업 경영진의 약 74%가 엔화 약세가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응답자의 30% 이상이 20여 년 만에 약해진 엔화가 수익을 잠식한다고 했고, 26%는 수익을 늘린다고 답했다.

엔화 약세와 동반한 연료 및 식품 비용 급증 등에 일본 가계가 고통받고, 이는 소비 심리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 "엔화 약세, 日 증시 매력과 엔 캐리 키우기도"

이번 엔화 약세가 일본 경제에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엔화는 중국 위안화와 대만달러화 대비 각각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한국 원화 대비로는 7년여 만에 가장 약해졌다. 아시아 경쟁국 대비 가격 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번 엔화 약세가 일본의 무역 적자를 어느 정도는 완화할 수 있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닛코자산운용의 존 베일 수석 전략가는 "일본 경제가 공급망 다변화의 확실한 공급원으로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화 약세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주식시장에 대한 외국인의 매력도도 높아질 수 있다.

엔화 약세로 일본 증시가 저평가됐다고 판단한 외국인은 미국이나 유럽 증시 대비 메리트를 느낄 수 있는 셈이다. 실제 전반적인 글로벌 증시 부진 속에서도 일본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지수보다 선전하고 있다.

올해 들어 지난 23일까지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는 각각 19%와 26% 하락했고, 유로스톡스50은 26% 떨어졌다. 이에 반해 닛케이225 지수는 12% 내리는 데 그쳤다.

일본 투자자가 캐리 수익을 내기도 한다. 레피니티브 자료에 따르면 엔화를 빌려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통화에 투자하는 전략은 올해 들어 약 13% 이상의 수익을 냈다.

다만, 엔화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지금보다 추가로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 것으로 관측됐다.





ywk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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