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반도체 시장은 전쟁터다. 50년 반도체 역사를 돌아봐도 죽이거나 버티거나의 싸움이었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게임 이론, 치킨게임(chicken game)의 역사가 반복된 곳이 바로 반도체 시장이다.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은 기업은 반도체 사이클이 꺾여도 공급량을 줄이지 않고 버티기에 들어간다. 그 사이 경쟁 기업과 후발 주자들이 도태되거나 무너지고, 이후 사이클이 돌아서면 이때부터는 승자 독식이다.


[그래픽] 글로벌 D램 매출 현황
[출처:연합뉴스]




1차 반도체 치킨게임은 1980년대 일본 기업들이 주도했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대대적으로 수율을 끌어올리면서 가격을 낮췄다. 일본 정부의 강력한 지원책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이들은 순식간에 D램(DRAM) 시장을 장악했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인텔을 위협했다. 일본 기업들은 수년간 저가 공세를 통해 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인텔은 결국 D램 사업에서 철수했다. 시장 주도권을 뺏기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구조가 됐다. 삼성전자는 이 틈을 타 저가형 메모리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다. 결과적으로 1차 치킨게임은 일본과 한국 기업이 승자였고, 미국 기업은 패자로 남게 됐다.

2차 치킨게임은 2000년대 대만 기업들이 시작하고 한국 기업들이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인텔 등 미국 기업의 반격과 삼성전자의 약진으로 일본 기업의 위상이 많이 약해진 때였다. 대만 기업들은 D램 생산량을 늘리고 가격을 인하해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려 했다. 하지만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D램 수요가 급감했다. 대만 기업들이 D램 감산에 들어갈 때 삼성전자와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는 감산 없이 버티기에 들어갔다. 2009년 독일 키몬다가 파산했다. 일부 대만 기업도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역시나 한국 기업들이 승자였다.

2010년대 초반 3차 치킨게임이 발발한다. 한국 기업들과 미국 마이크론, 일본과 대만까지 각축전이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던 때다.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섰다. 하지만, 경쟁적인 증산은 다시 공급 과잉으로 이어졌다. 2012년 마지막 남은 일본의 D램 기업 엘피다가 파산했다. 이후 D램 시장은 한국 기업의 독무대였다. 2017년부터 시작된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매년 수십조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반도체 치킨게임 역사에서 한국 기업, 특히 삼성전자는 거의 매번 승자로 남았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감산 결정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시장의 감산 기대에도 '인위적인 감산은 없다'는 기조를 유지했던 터라, 삼성전자 주도의 4차 치킨게임이 시작된 것이라 봤다. 소수의 전문가들이 제기했던 삼성 피봇(Pivot, 입장 전환)이 현실화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7일 올해 1분기 잠정실적을 내놓으면서 '의미 있는 수준'까지 메모리 생산량을 하향 조정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감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여러 해석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수개월간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앞서 감산에 나섰던 경쟁 업체들과 시장 점유율을 많이 벌려놨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세계 2위와 3위 D램 업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작년 말 감산에 들어갔다. 그 사이 삼성전자가 점유율을 충분히 확보했고, 반도체 사이클 업턴을 앞당기기 위해 감산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이다. 삼성전자의 감산 결정이 전해지고서 D램 가격은 미미하게나마 반등에 성공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가 역대로 승자였다고 하지만, 반도체 전쟁의 역사를 봤을 때 최강자도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단 위기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과거 D램 세계 1위 미국의 인텔, 일본의 NEC 등도 치킨게임에서 물량과 타이밍 조절에 실패하며 무너졌다. 삼성전자 반도체는 올해 1분기와 2분기 각 2조~3조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대규모 적자를 감수하면서 언제까지고 버티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감산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는 삼성전자가 안주하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메모리 삼두체제(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정상 자리가 너무 편해서 경쟁사들의 점유율을 더 뺏어오려는 욕구가 없었을 것이란 평가도 내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반도체 시장은 과거보다 훨씬 커졌는데 플레이어 숫자는 많지 않다. 이코노미스트지의 지적대로 메모리 시장은 3개사의 과점 체제에 가깝다. 3개사의 글로벌 점유율 합은 95%에 육박한다. 2위와 3위 기업 모두 덩치가 워낙 커진 상황이라 한 곳이 무너지면 되레 시장의 생태계가 망가질 수 있는 구조다. 이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무리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가격 안정화를 추구하는 전략이 업계 전반에 '윈윈'이 될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치킨게임의 양상이 과거와는 달라졌지만, 급변할 여지는 열려 있다. 삼성전자가 감산에 더해 투자를 줄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감산만으로 약해진 수요와 재고 과잉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장 상황에 달렸다. 메모리 침체가 장기화하면 그때부턴 정말로 피 튀기는 새로운 게임판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 (취재보도본부 기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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