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증권, 최초의 국채 중개…교보증권 오늘날까지 명맥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쓰였던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서울=연합인포맥스) ○…"원래 조선은 민족자본의 축적이 얕다"
1947년 한겨울,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회의실에서 나온 말이다. 2년 전 해방을 맞았지만, 금융으로 산업을 진흥해야 자주독립국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경제계가 공유하던 자리였다.

당시 한반도 금융시장은 공동화(空洞化)됐다. 해방 전 시장을 주도하던 일본 회사는 사라졌고, 미군정의 명령으로 조선증권취인소는 문을 닫았다. 산업발전을 지원할 증권시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같은 해 뜻을 가진 이들이 서울 남대문로 2가의 한 식당에 모였고, 김익증권 출신 송대순을 중심으로 증권구락부를 창립했다. 이들은 증권거래소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증권사부터 인가받았다. 194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증권사인 대한증권은 이렇게 문을 열었다.

대한증권을 바라보던 눈초리는 따가웠다. 증권업에 대한 몰이해는 정치권에 만연했고, 언론계 일각에선 정부가 합법적으로 도박을 장려한다고 혹평했다.

이러한 세평 속에서도 송대순 사장이 이끌던 대한증권은 신생 독립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했다. 지가증권과 건국국채를 유통하면서다.

지가증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한 농지개혁 수단이다. 당시 정부는 지주에게 지가증권을 주는 대신 농지를 거둬들였고, 거둔 땅을 소작농에게 넘겼다.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전환해 소득분배를 개선하는 작업이었다.

이때 대한증권은 지주로부터 헐값에 지가증권을 사들여 기업가에게 되팔았다. 기업인은 정부로부터 일본 기업 자산을 인수할 때 헐값의 지가증권을 대금(액면가 적용)으로 낼 수 있었다. 최종건 SK그룹 창업자·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자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사업을 키웠다. 대한증권이 농업자본의 산업자본화를 뒷받침한 셈이다.

대한증권은 최초의 국채를 유통하기도 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초기 정부가 건국국채를 발행하며 민간에 물량을 떠넘겼는데, 이를 대한증권이 중개해 유동성을 공급했다. 신생 독립국의 재정안정을 지원하고, 증권매매를 활성화한 것이다.

이러한 대한증권을 독립운동가 신용호의 교보생명이 인수한 건 우연일까. '광야'를 쓴 이육사로부터 민족자본을 만들라는 당부를 받은 신용호는 1958년에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보험)을 탄생시켰다. 이후 교보생명은 1994년 대한증권을 인수해 교보증권으로 간판을 바꿨다. 광복 후 최초의 증권사가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와 증권업계는 또 다른 과제를 해결 중이다. 고금리로 취약한 고리가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리스크 등을 극복하고, 디지털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지난달 교보증권은 경쟁력을 끌어올리고자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교보증권 관계자는 "양손잡이 경영에 걸맞도록 실행력을 강화하고 디지털 비즈니스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양손잡이 경영이란 기존 사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교보그룹의 경영이다.

혁신 중인 교보증권과 증권업계가 앞으로 대한민국에 미칠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되는 광복절이다. 금융 불모지였던 신생 독립국의 경제마저 성공적으로 떠받쳤기 때문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는 게 대산(大山) 신용호의 정신이다. (투자금융부 서영태 기자)

ytseo@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08시 19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