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오는 7일로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 '신(新)경영'을 선언한 지 20주년을 맞는다. 선대 회장으로부터 삼성을 물려받은 이 회장은 5년간 그룹 전반의 장단점을 파악한 후 '신경영' 선언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삼성에 입히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삼성 내부에는 항상 긴장감과 위기의식이 감돌았고, 이는 지속적인 혁신으로 이어졌다. 연합인포맥스는 앞으로 사흘에 걸쳐 신경영 선언 당시의 상황과 신경영으로 촉발된 혁신의 명과 암, 그리고 향후 과제를 차례로 짚어본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장용욱 기자 =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다."

지난 1992년 말, 선대 회장으로부터 삼성을 물려받은 지 5년째를 맞은 이건희 회장은 여전히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 회장이 물려받은 후 삼성그룹은 매출액이 2.5배가량 상승하며 국내에서는 재계 1위던 현대그룹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빠른 시간 안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란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이 고민은 이듬해 '신(新)경영' 선언으로 이어졌고, 그 시점을 전후로 이 회장은 삼성에 많은 '독설'을 쏟아부었다. 국내 1등에 안주해 나태해진 임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경종을 울려 새로운 혁신을 독려했던 것이다.

◇ "2등 정신을 버려라" = 지난 199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한 이 회장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시내에 있는 한 유통매장이었다.

그곳에서 이 회장은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인 삼성전자 제품을 보고는 바로 사장단을 호출했다. 소니 등 당시 일류 업체의 가전제품과 삼성전자의 제품을 즉석에서 비교하도록 한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현장에서 바로 이 회장은 그룹 수뇌부에 "2등 정신을 버려라"며 강하게 질타했다.

◇ "삼성전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주세요" = 1993년, 이 회장은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을 맡고 있던 후쿠다 다미오 씨에게 삼성전자의 문제점을 여과 없이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해 6월 4일, 후쿠다는 일본 호텔방에서 이 회장에게 직접 13쪽 분량의 '보고서'를 전달했다. 보고서에는 회사가 양적 목표에만 급급한 나머지 장기적 성장전략과 부가가치 창출, 시너지 같은 질적 요인들은 소홀히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경영진은 어설픈 절충안에 집착하고 책임 부서가 명확하지 않아 실패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는다는 등의 지적도 담겼다.

그날 이 회장은 호텔방에서 보고서에 언급된 삼성의 문제점에 대해 후쿠다와 장장 11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다음날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 이 회장은 그 보고서를 또다시 수차례 정독했다. 그리고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호텔로 삼성그룹의 핵심 경영진 200여 명을 긴급 소집했다. 드디어 '신경영' 선언을 결심했던 것이다.

◇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 프랑크푸르트로 모여든 경영진 200여 명 앞에서 이 회장은 작심한 듯 이 말을 앞세워 강력한 '혁신'을 주문했다.

그는 "삼성이 자만심에 빠져 위기를 진정한 위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며 "이런 상태로는 21세기에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이어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낀다"고 강조했다.

이 발언을 통해 이 회장은 현실인식과 목표, 업무방식을 과감하게 바꿀 것을 주문했고, 이는 삼성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신호탄이 됐다.

◇ "3만명이 만들고 6천명이 고치는 비효율이 만연하다" =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한 이 회장은 이후 런던·오사카·후쿠오카·도쿄 등을 68일 동안이나 오가며 임직원들에게 혁신 방향을 주입했다. 그는 1천800명과 350시간이나 대화했고 사장단과 800시간에 걸쳐 격정적인 토론을 이어갔다.

당시 이 회장이 가장 강조한 것은 '양보다 질'이었다. 그동안 대량 생산에만 급급했던 나머지 등한시된 품질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불량 추방'을 수없이 강조했다.

이 회장은 "소비자한테 돈 받고 물건 내 주는데, 불량품을 주는 게 미안하지도 않은가"라며 사장단을 질책했고, "세계 일류가 되면 이익은 지금의 3~5배 난다. 질을 위해서라면 1년간 회사문을 닫아도 좋다"고 강조했다.

품질에 대한 이 회장의 고집은 대단했다. 당시 이수빈 비서실장이 여러 사장과 함께 이 회장 방을 찾아와 "아직은 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입니다"고 건의하자, 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품질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표현이었다.

◇ "다 불태워라" = 이 회장이 '품질 경영'을 선언했지만 삼성 임직원들의 몸에 밴 '물량 지상주의'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신경영 선언 이듬해에도 삼성전자의 휴대전화기 품질은 여전히 확보되지 않아 불량률이 11.8%에 달했다. 이 때문에 1995년 들어서는 새해부터 휴대전화기 소비자로부터 불량품에 대한 항의가 잇달았다. 그러자 이 회장은 시중에 판매된 15만대 전부를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 해 3월 9일 수거된 휴대전화는 삼성전자 구미공장 운동장에 던져졌다. 그곳으로 2천여 명의 임직원들이 모여들자, 10여 명의 직원들이 해머로 쌓여 있는 휴대전화기를 산산조각냈고, 이어 그 자리에서 모두 불태웠다.

당시 가격으로도 500억원에 달했던 제품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그때야 삼성 임직원들은 불량품 추방에 대한 이 회장의 의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 "왜 일본에 뒤지는 지 냉철한 반성과 자각 있어야" = 신경영 선언 이후 이 회장이 중점을 뒀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일본 배우기'였다. 실제로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이 회장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200여 명의 임직원을 다시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임진왜란 직전에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선진국이던 우리가 왜 지금은 뒤지는지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후 그 해 9월 이 회장은 그룹의 주요 관리본부장들을 일본에 보내 선진체계를 둘러보도록 했다.

이처럼 그가 일본에 집중했던 것은 청년 시절 와세다대학을 다닌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일류기업이 되려면 일본을 넘어서야 했던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 "오후 4시가 되면 회사에서 다 나가라" = 1993년 7월 7일, 삼성그룹은 임직원들이 아침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조기출퇴근제(7ㆍ4제)'를 본격 시행했다.

당시만 해도 삼성을 비롯한 국내 대부분 기업에서 8시에 출근해 야근까지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의 능률을 떠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제품 생산뿐 아니라 근무 방식에서도 양보다 질을 우선시했다. 이에 그는 임직원들이 하루 8시간 근무만 마치고 오후 4시 이후에는 회사 밖으로 나가 자기 계발을 하라고 독려했다. 임직원들의 일의 능률을 높여주는 것을 품질경영의 밑거름으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이 회장의 의지는 이후 '자율출근제(자유롭게 출근해 8시간 근무만 채우면 퇴근할 수 있는 제도)' 등으로 확대개편됐다.

yuj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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