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찬 바람이 불면 신창재 교보생명 대표이사 겸 이사회 의장은 장롱에서 노란빛 코트를 꺼낸다. 직원들은 이 외투를 입은 신 의장을 볼 때면,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언제나 신 의장의 손에 들려있는 검은색 서류 가방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모서리가 꽤 닳은 이 가방을,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교보생명에 첫 출근을 했던 1996년에도 들고 있었다.

신 의장은 법인카드를 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회의가 끝나고 직원들과 밥을 먹을 때도, 그는 개인카드를 쓴다. 개인카드를 꺼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인생 선배가 후배에게 건네는 밥 한 끼여서다.

지난 2003년, 신 의장의 일가는 1천830억 원의 상속세를 납부했다. 교보 그룹의 창립자인 고(故) 신용호 명예회장으로부터 교보생명 지분 약 40%가량을 물려받으면서다.

이는 1966년 3월 3일 국세청 개청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최종현 전 SK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회장이 낸 730억 원, 정주영 현대그룹 창립자 유족들의 300억 원과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였다.

물론 2018년 이후로는 삼성과 LG가 더 큰 상속세의 주인공이 됐지만, 기업의 규모를 비교한다면 그 시절 신 의장 일가의 상속세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하는 규모다.

당시 현금이 없었던 신 의장 일가는 2천억 원에 육박하는 세금을 교보생명 지분 5.85%로 물납했다. 그리고 정직했던 그 납부는 지금의 주주 간 분쟁 불씨가 됐다.

교보생명의 지분이 외부에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1980년, 광화문 교보문고 현판이 걸린 지금의 사옥을 지으면서부터다. 당시 준공을 맡았던 대우그룹은 교보생명 지분 35%를 받고 사옥을 지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이유로 대우그룹은 대우건설과 대우인터내셔널로 쪼개졌고, 이들이 보유한 교보생명 지분은 한국자산관리공사(이하 캠코)에 이관됐다. 그리고 공적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캠코는 교보생명 주식을 매각했다.

이때 캠코가 관리하던 교보생명 주식을 사들인 주인공이 어피너티 컨소시엄이다.

하지만 계약서가 화근이었다. 교보생명 기업공개(IPO)를 포함한 세부 조건이 시장 상황과 맞물려 어긋나면서, 어피너티 컨소시엄은 풋옵션을 행사했다. 2018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주주 간 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 의장 일가가 1천830억 원의 상속세를 현물 납부하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신 의장 일가의 상속세 납부는 선친의 철학을 따른 일이라고 한다. 신용호 창립자는 평소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경영 이념으로 삼았다. 그에게 불로소득은 기업에 '득' 아닌 '해'였다.

그래서였을까. 선친의 집무실조차 고스란히 물려받아 쓰고 있는 신 의장은 유독 주변에 높은 윤리 의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타인의 돈을 관리하는 것이 금융업의 본질이라면, 금융그룹의 최고경영자(CEO)는 제조업, 아니 보통 사람보다도 더 큰 윤리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번 주말, 신 의장은 싱가포르로 향한다. 세계보험협회(International Insurance Society·IIS) 연차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3월 IIS가 선정한 올해의 '보험 명예의 전당 월계관상(Insurance Hall of Fame Laureate)' 수상자로 선정됐다. 보험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에게 주는 이 상을 해외에서는 보험업의 노벨상으로 손꼽는다. 신 의장은 오는 6일 ISS 연차총회에서 이 상을 수상한다.

신 의장이 교보생명에 첫발을 디뎠던 1996년 그해, 신용호 창립자도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한 공을 인정받아 이 상을 받았다. IIS가 대를 이어 부자에게 이 상을 시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교보문고와 교보생명으로 대변되는 교보 그룹은 국내 오너가 기업 중에서도 정직, 성실한 이미지로 손꼽히는 기업"이라며 "상생도 잇속을 챙기기 바쁜 금융권에서 착한 금융회사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롤모델이 됐으면 한다"고 귀띔했다.

고(故)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와 신창재 교보생명 대표이사 겸 이사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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