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목욕재계(沐浴齋戒). 새로이 거듭나려면 더러운 때를 씻어내야 한다는 교리다.

회사도 새로운 출발 전 목욕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최고경영자(CEO)가 새로 부임한 회사라면 부실을 최대한 털어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빅 배스(Big Bath)란 용어를 이사회와 소통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최근 실적을 발표한 한 대형 증권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해 4분기에 충당금을 대규모로 쌓은 목적이 1년차 CEO의 빅 배스 때문이 아니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빅 배스는 회사의 더러운 때를 한꺼번에 씻어낸다는 뜻이다. CEO 교체 초기에 행해지는 회계처리로, 직전 CEO 재임 기간에 발생한 손실의 책임을 명확히 할 목적에서 진행된다.

초임 CEO가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는 깨끗한 상태의 재무제표로 임기를 시작하면 향후에 실적을 크게 개선하기도 유리하다. 대규모 손실 반영으로 인한 어닝쇼크 수준의 전기 실적이 비교 대상이기에, '기저효과'에 힘입어 성과가 더욱 빛난다.

거의 모든 증권사가 국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사업과 해외 상업용 부동산 투자에서 손실을 본 가운데 줄줄이 교체된 신임 증권사 CEO가 빅 배스를 고려하지 않기란 어려워 보인다. 전임 CEO가 재무상태표에 손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을 경우엔 더욱 그렇다.

작년 말 교체된 한 증권사 전임 CEO는 "충당금을 보수적으로 쌓지 않은 부분은 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10대 증권사 중 미래에셋·한국투자·삼성·하나·메리츠·키움증권의 CEO가 교체됐다.

공교롭게도 이들 증권사는 지난 분기에 부실을 적극적으로 털어냈다. 일례로 CEO 교체 전인 작년 3분기에 1천541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던 한국투자증권이 4분기에 1천518억 원의 순손실을 발표했다.

한국투자증권은 "국내외 부동산 관련 충당금 및 평가손실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CEO가 부임한 지 1년가량 지난 하나증권은 작년 4분기 순손실이 2천565억 원이라고 밝혔다. 전기보다 2천억 원 이상 커진 규모인데, 충당금 등 전입액이 2천126억 원에 달해서다.

미래에셋증권 또한 1천억원의 충당금을 적립했다. 태영건설을 포함, PF 전반에 대해 보수적으로 대응한 셈이다. 이 밖에도 해외 대체투자 자산과 관련해 3천500억원 규모의 평가손실과 손상차손을 인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증권 또한 1천800억원 규모의 충당금 관련 비용을 반영했다. 삼성증권은 이미 지난해 2분기부터 선제적으로 신용공여 익스포저를 줄이고 장기 대출로 전환하는 등 리스크 관리에 고삐를 쥐었기에 업계에서는 삼성증권의 충당금 비용이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해왔다.

또 다른 증권사 CFO는 "부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딜은 전부 다 충당금을 쌓고 있다"며 "보수적으로 쌓고 있다"고 설명했다.

NH농협금융지주 등 금융사 빅 배스는 과거에도 있었다. CEO의 '꼼수'가 아니라 전략 중 하나로 쓰이기도 한다.

때마침 타이밍이 좋다. 빅 배스 후에는 나빠진 실적 탓에 주가가 떨어지는 게 일반적인데, 저(低) 주가순자산비율(PBR) 테마를 타고 증권사 주가가 고공행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인포맥스 업종현재지수(화면번호 3200)에 따르면 증권업종 주가는 올해 초 들어 현재까지 16%가량 상승했다.

금융감독원은 아예 목욕탕으로 떠밀어주는 모습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부실한 PF 사업장에서 발생한 손실을 전부 인식해 충당금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당국이 금융회사 건전성을 강조하는 상황을 증권사가 이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 신임 CEO의 실적을 평가할 때 빅배스 효과를 고려하며 판독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금융부 서영태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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