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중앙은행과 금융시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시장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금리와 환율, 주가 등 시장의 가격 변수가 통화정책의 큰 흐름을 바꿔놓을 때도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중앙은행에 맞서지 말라'라는 시장 격언대로라면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은 갑이고, 시장은 을에 가깝다. 중앙은행은 시장에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어르고 달래고 배려할 줄 아는 큰형님 같은 존재여야 한다.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위상은 여기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통화정책에 가장 민감한 채권시장은 특히나 한은의 배려가 아쉽다고 토로한다. 지난 8월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으로 한은은 금리 정상화 시동을 본격화했다. 이주열 총재를 비롯한 한은 집행부의 매파적 발언, 이에 더해 매파 성향이 넘쳐나는 금융통화위원회 지형을 보면서 시장은 이미 추가적인 금리 인상에 대비해왔다. 채권시장 참가자들은 시장금리가 올라 채권가격이 일정 부분 떨어지는 건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인다.

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는 게 문제다. 국고채 3년물 금리는 2.0%를 돌파했다. 한은 기준금리와의 차이가 무려 1.25%포인트(125bp) 이상이다. 2013년의 미국 테이퍼 텐트럼(긴축 발작) 시기와 2017년의 미국 금리 인상기의 공포를 넘어선 수준이다. 채권시장에서 십수년 몸담았던 베테랑 딜러들도 역대급 위기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다. 국채당국인 기획재정부가 국고채 발행량 조절이나 중도환매(바이백) 확대 등의 대책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장중 구두 개입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더 할 수 있는 카드가 많지는 않다.

커다란 균열이 생겨버린 시장 수급은 좀처럼 정상화가 어렵다. 채권시장의 시선은 통안채 발행 기관이자 국고채 매입이란 막강한 기능을 보유한 한은의 역할에 쏠렸지만, 그동안 한은의 반응은 냉담했다. 기준금리 인상의 주체인 한은이 시장 금리 상승을 막고자 나서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원칙론에 충실했을 거라 짐작된다.

지난 27일 드디어 한은이 등장했다. 한은은 연합인포맥스를 통해 다음 달 통안채 발행 규모를 축소하고 바이백 물량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개입성 발언을 내놓기 불과 한두 시간 전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어떤 액션을 취하기도 어렵다던 한은의 전격적인 등장이다. 시장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려 온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장의 아우성이 넘쳐날 때는 외면하다가 정부의 공조 요청이 있고서야 움직인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개입 타이밍에 아쉬움이 남는다. 구두 개입의 효과는 장중에 극대화된다. 장 마감 후의 개입 효과는 반감되기 마련인데, 한은이 개입성 발언을 내놓은 시간은 오후 4시를 훌쩍 넘긴 때였다. 평소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한은이 장 마감 후 뒷북성 개입에 나선 사례는 이전에도 종종 있긴 했다. 실제 다음날인 28일 한은이 이달보다 2조4천억원 줄어든 통안채 발행 계획을 제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되려 한은의 발표 직후 채권 금리는 큰 폭으로 올라 패닉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한은의 자발적인 시장 안정 의지라기보단 등 떠밀려서 나온 뒷북 대책이란 인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한 발 더 앞서 나와야 했다. 이달 들어 통안채 입찰 미매각 사태가 거듭됐다. 여섯 차례의 입찰 중 무려 다섯 차례 입찰에서 발행 예정액을 채우지 못했다. 기재부의 국고채 2년물 신규 발행에 맞서 한은이 새로 찍어내기 시작한 통안채 3년물은 특히나 외면당했다. 미매각이 반복되는 입찰을 보면서 한은은 이미 채권시장의 수급 균열이 심각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한은의 시장 안정을 위한 조치는 이때 이뤄졌어야 했다. 통화당국으로서의 원칙론에 빠져 미적대는 사이 시장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았다. 신뢰를 잃은 중앙은행의 대책이 시장의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한은은 시장에 대한 배려심도 키워야 한다. 한은의 금리인상 페달은 이미 세차게 돌아가고 있다. 전 세계 중앙은행과 비교해도 충분히 선도적인 행보다. 시장이나 경제주체 모두 이런 사실을 알고 대비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11월 금리 인상은 이미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내년 연초에도 한 두 차례 더 인상될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데도 한은은 끝없이 금리 인상 군불 때기를 하고 있다. 안 그래도 패닉에 빠진 시장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다소 부진한 3분기 국내총생산(GDP) 속보치 발표 전날 한은 조사국장이 기자간담회를 열어 경기 회복과 물가 상승을 강조한 것이나, 지난 27일 물가 상승세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란 내용을 담은 연구보고서를 발표한 것 등을 보면서 채권시장은 해도 너무한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은의 금리 인상 시그널은 시장에 충분히, 그리고 넘치게 전달이 됐다. 금리인상에 대한 근거 쌓기는 시장 상황이 안정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시장과 소통을 더 강화하고, 아플 때 손도 뻗어주면서 신뢰를 회복하는 게 지금 바로 해야 할 일이다. 시장이 없는 한은의 존재는 상상하기 어렵다. 한은이 금리 정상화라는 큰 줄기를 잘 따라가면서도 곁가지도 살피는 배려심을 더 키웠으면 좋겠다. 중앙은행은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될 이유가 전혀 없다. (금융시장부장 한창헌)

ch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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