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지금은 연세 지긋한 전직 한국은행 고위 인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난다. 중앙은행 총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아무리 봐도 소통 능력인 것 같다고. 30년 넘게 한은에 근무하면서, 여러 총재를 보필하면서 절실하게 느껴왔단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본인의 주장만 펴는 불통 총재는 최악이다. 물론 본인 재직 중에는 이런 불통 총재는 없었다고 단서를 달긴 했다. 믿거나 말거나.

역대 한은 총재들도 임기 중 어려웠던 일을 꼽으라면 예외없이 소통 문제를 든다. '똑부(똑똑하면서 부지런한)'의 대명사인 한은 직원 수만 2천명이 넘는다. 익명 게시판 등에 올라오는 이들의 쓴소리 강도는 고위 간부들도 가끔 견디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똑부이면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총재가 오면 그야말로 강대강의 충돌이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내부게시판 감찰 소동까지 일어났던 곳. 한은의 예상 밖 모습이다.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으로서 한은 총재의 소통 능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금통위원 그들이 누구인가. 자천타천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학식과 경륜의 소유자다. 대부분 경제 학자와 금융·경제 고위관료 출신으로 자존감이 넘쳐난다. 금통위가 합의 기구이기는 하지만 총재는 의장으로서 이들을 끌고 가야하는 입장이다. 회의만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협의하고 소통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다 금통위원 대표로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시장과도 직접 소통해야 한다. 간담회 발언 하나하나에 금리와 환율이 춤을 추니 금통위의 분위기나 가이던스를 시장에 적확하게 전달하는 소통 기술도 필요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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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총재 후보자는 종종 미 하버드대 출신의 천재 경제학자로 소개된다. 그의 이력만 봐도 국내 내로라하는 경제석학들이 걸어온 길을 뛰어넘는다. 미 로체스터대 교수, 서울대 교수,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 국장 등등. 어느 하나 쉽게 거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더군다나 IMF의 국장 역임은 한국인 중 첫 사례다.

한은 총재 후보로서 그의 전문성에 대해선 검증할 게 많지 않아 보인다. 시장에서 일순위로 생각하는 총재의 소통 능력은 아직 물음표지만, 공직 생활 중 보여준 그의 뛰어난 공감 능력에서 소통 기술도 기대 이상일 것이라 예상해본다.

이 후보자는 2008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으로 임명됐다. 그의 첫 공직 생활이다. 금융위는 이명박 정부의 시작과 같이한 신설 부처. 당시 금융위원회 출입기자로서 기억을 되살려보면 초대 위원장과 부위원장 모두 민간 출신이 임명됐을 때 금융당국 안팎으로 걱정들이 많았다. 신설 조직의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던 걸로 기억한다. 금융시장 환경이 악화하던 시기라 엘리트 의식이 매우 강한 금융 관료들을 비관료 출신들이 잘 통제하고 리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기우였다. 40대 후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임명된 이 후보자는 대부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국장과 1급(상임위원) 관료들을 직접 상대하며 당국을 끌고갔다. 당시 위원장보다 더 그립이 강하다는 얘기들이 금융위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대가 센 관료들을 리드할 수 있었던 힘은 일방향의 지시가 아닌 양방향의 소통 능력이었다. 다른 학계 출신과 비교해 일에 대한 판단이나 의사결정도 매우 빠르다는 평가가 많았다. 업무 처리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웠지만, 사석에선 나이 많은 간부들을 '형님'으로 정중하게 모셨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취임 이후 몇 개월 만에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그의 존재는 더 빛이 났다. 국내 금융사들이 달러 부족 등으로 공멸의 위기까지 갔을 때다. 주식은 물론 모든 금융자산 가격이 폭락했고 달러-원 환율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외신들의 일방적 보도나 외국계 보고서가 국내 경제와 시장에 충격을 주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 정부는 '한국경제바로알리기 지원단'을 급하게 꾸렸고 이 후보자가 단장을 맡았다. 지원단은 한은과 기재부, 금융위, 국책연구원 등이 참여하는 범부처 조직이었다. 그는 외신 본사를 직접 방문해 설명하고 항의도 했다. 외국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들과 간담회를 열고 컨퍼런스콜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당국자의 시장 안정을 위한 능력치는 교류와 소통에 있다는 점을 몸소 보여줬다.

한은 총재로서 시장과 소통 능력은 어느 한순간 심어지는 게 아니다. 당국이 정책 방향을 잘 잡고도 경제주체, 시장과 소통이 원활치 않으면 그 효과는 반감되거나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정책 방향에 걸맞은 가이던스를, 그것도 시의적절하게 제시하는 전달 능력은 이제 한은 총재가 가져야 할 제1의 덕목이다. 2026년 임기가 끝났을 때 역대 어느 총재보다 시장과 소통이 잘 됐던 총재라는 평가를 받는 것. 그 이상의 명예는 없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금융시장부장)

ch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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