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국내 채권시장과 자금시장이 요동칠 때마다 등장해 자금경색을 잠재웠던 '채권시장안정펀드(이하 채안펀드)'가 이번에도 이름값을 할 수 있을까. 채안펀드는 이른바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채권시장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조성됐던 펀드다. 외환위기 직후 투신사의 수익증권 환매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됐던 채권시장안정기금(채안기금)과 유사하지만, 특정 채권을 집중적으로 매수했던 채안기금과 달리 'BBB+' 이상의 금융채와 회사채, 여전ㆍ할부채, 프라이머리 CBO(채권담보부증권) 등 국공채를 제외한 채권을 주로 매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채안펀드의 본격적인 가동을 함께 양도성예금증서(CD)와 기업어음(CP) 등 단기금리가 안정을 되찾았고 크레디트채권 신용스프레드도 축소됐다. 실제로 지난 2008년 12월 초 7.10%까지 치솟았던 91일물 CP 금리는 2009년 1월 말에는 3.95%로 떨어졌다. 2개월 사이에 무려 315bp나 낮아졌다. 같은 기간 403bp까지 확대됐던 한국은행 기준금리와 91일물 CP금리 스프레드도 145bp까지 줄었다. 채안펀드가 명실상부한 채권시장 안정화 대책으로 이름을 떨친 셈이다.





이런 화려한 전력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자금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채안펀드가 등장하고 있다. 이번에도 정책당국은 채안펀드를 골자로 하는 유동성 공급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다. 강원도 레고랜드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불이행 사태 등으로 자금시장 경색 우려가 커지자, 정책당국은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채안펀드 20조원을 포함해 50조원의 유동성 대책을 내놨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자금시장의 '돈맥경화'가 시원하게 뚫리지는 않는 모양새다. 정부의 유동성 공급대책 발표로 국고채 금리는 떨어지고 있으나, 자금시장은 여전히 불안하다. 지난 23일 거시경제금융회의 이후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연 4.632%에서 50bp 정도 하락했다. 그러나 CD금리는 연 3.97%까지 되려 올라 4%를 눈앞에 뒀다. 특히 대책발표 직전 연 4.25%였던 CP금리는 전일 연 4.67%로 치솟았다. 올해 연중 최고치를 다시 썼다. 회사채 금리도 불안하긴 매한가지다.





사실 금융위기 당시 채안펀드가 나왔을 때도 초기에는 효과가 크지 않았다. 당시 자금시장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채안펀드의 가동과 함께 한국은행의 대대적인 기준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조치가 동시에 이뤄진 덕분이다. 당시 한은은 2008년 10월 연 5.00%였던 기준금리를 2009년 1월 연 2.50%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250bp나 인하했다. 아울러 공개시장조작과 총액대출한도, 채안펀드 지원 등을 통해 시중에 돈을 풀었다. 또 환매조건부(RP) 대상채권을 은행채와 특수채 등 신용물 위주로 편성하고, 대상기관에 증권사를 새로 포함해 증권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크레디트물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채안펀드보다 통화정책이 자금시장을 안정시킨 것으로 보는 게 옳다는 주장이 나왔던 이유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와는 거시ㆍ금융 환경이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통화당국인 한국은행이 예전처럼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내릴 수도 없는 처지다. 국내 소비자물가가 5~6%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미국 연방준비제도도 한꺼번에 기준금리를 75bp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밟고 있다. 한미 정책금리의 역전이 심화하면 달러-원 환율이 추가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여기에 수출이 역성장하고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는 등 스태그플레이션이 가시화할 수 있다는 점도 크레디트물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채안펀드만으로는 예전과 같은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당국이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금융 등 금융지주 회장들과 함께 민간차원에서 연말까지 95조원 규모의 유동성 및 자금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도 금융시장의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벌써 시장의 시선은 금융당국을 넘어 통화당국의 액션에 맞춰지고 있다. 정부대책이 시장의 막연한 불안심리를 완화해줄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같이 드라마틱하게 단기금리를 끌어내리고 신용스프레드를 축소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당장 인플레이션에 맞춰진 한국은행의 관심을 고려하면 기준금리 인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만큼 단기금리 하락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여기에 저성장과 고금리에 따른 상환위험 확대 등 거시ㆍ금융 환경은 당분간 차주들에게 높은 신용 프리미엄과 신용스프레드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취재보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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