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기업의 가치에 점수를 매기는 곳이 주식시장이라면, 채권시장은 기업의 죽고 사는 문제까지 가늠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시장금리가 치솟고 자금줄이 말라가는 상황에 부닥치면 이 차이가 분명해진다. 강원도 레고랜드 채무불이행 사태를 지나면서 자금 상황을 보여주는 채권금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또 한 번 목도했다. 기업이 금융 매커니즘에 무지하거나 애써 무시한다면, 그들 스스로 죽고 사는 문제를 방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레고랜드
출처:연합뉴스 사진

 


레고랜드 사태는 유례없는 강도의 글로벌 통화 긴축으로 유동성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와중에 터졌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위험이 부각되면서 여기에 목줄이 잡힌 기업들이 속속 드러났다. 먼저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한 건설사들과 ABCP 매입확약을 많이 한 증권사들이 위험 리스트에 올랐다. 이후로는 공사채, 우량 회사채 가릴 것 없이 금리가 폭등했다. 트리플 A등급의 대형 증권사가 지급보증한 공사채 금리가 6%대를 넘나들어도 사려는 투자자가 없을 정도로 심리가 얼어붙었다. SK 등 우량 대기업들조차 공모 회사채 일변도의 자금 조달 방식에서 벗어나 장기 기업어음(CP), 사모 회사채 등으로 조달 라인 확대를 꾀하고 있다.

신용등급 BBB급 이하의 기업들은 업종 가리지 않고 신용위험에 직면한 분위기다. BBB급 이하 회사채는 민평금리(민간채권평가사 평균 평가금리) 대비 500~600bp(베이시스포인트)를 웃도는 사례가 허다하다. 연초 5~6%대에 거래되던 비우량 회사채 금리가 최근에는 10%대에서 거래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 채권시장에서 10%대 금리에 유통되는 회사채를 봤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없을 정도인데, 우리 기업이 처한 자금상황이 2008년 금융위기 수준에 버금간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용평가사들 움직임도 무척 바빠졌다. 신용등급 하향 조건을 충족하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이 감지되는 곳은 등급 하향을 미리 경고해야 그나마도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채권이든 주식이든 투자자 입장에선 신평사의 움직임을 각별히 주목해야 할 때다.

 

BBB급 회사채 만기별 신용 스프레드
출처:연합인포맥스

 


앞으로 금융 리스크에 미리 대비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최근에 만난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증권사들이 ABCP 확대 발행을 요청해왔지만, 금리 위험 등을 고려해 보수적으로 대응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사업성 하나만 보고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던 일부 건설사들이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 것과는 다른 분위기라고도 전했다. 이들처럼 매크로 위험을 감지하고 차입금이나 익스포저를 선제적으로 줄인 기업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기업이 무방비 상태라는 게 우려되는 부분이다. 현금 유동성이 풍부하거나 출자 등의 형태로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기업 계열은 형편이 나은 편이다.

초저금리 시대에 현금을 들고 있는 기업이 바보 취급을 받았다면 지금은 현금 보유 규모 자체가 실력이 되는 판이다. 매크로와 금융, 시장에 눈 밝은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들, 그리고 정말로 운이 좋은 기업들이 아니면 먹고살기 힘든 세상을 맞이했다. 돈줄이 얼어붙은 이 고난의 시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대비에 나서야 한다. 자금경색과 인플레의 시기가 지나면 경기 침체라는 또 다른 공포가 몰려올 채비를 하고 있다. 금융위기를 거치며 일부 대기업들이 그랬듯 최근 빅테크 기업과 가상자산 업계 등에서도 매크로 전문가, 금융시장 전문가를 속속 영입하고 있다는 소식은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취재보도본부 기업금융부장)
chhan@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2시간 더 빠른 10시 47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