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회사채 만기는 통상 3년이라는 관례가 깨지고 있다.

신용등급이 비교적 좋은 우량 기업일수록 최근 들어 회사채를 발행하면서 만기를 길게 가져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5ㆍ7년 정도는 기본이고 10년 만기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심지어는 만기가 20년인 회사채도 등장했다.

공기업들 위주로 나타나던 회사채 만기 장기화 현상이 일반 기업들로도 확산하고 있다.

15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올해 10월 이후 만기가 5년 이상인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공기업, 금융사 제외)은 24곳에 달한다.

삼성ㆍSKㆍLG그룹 등 올 들어 회사채 발행량이 많았던 대기업 그룹의 계열사들이 만기가 긴 회사채를 많이 발행했다.

SK그룹에서는 지주회사인 SK를 비롯해 SKC&CㆍSK에너지ㆍSKCㆍSK해운ㆍSK네트웍스 등이 5년물 이상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ㆍ삼성물산ㆍ호텔신라ㆍ제일모직 등 삼성그룹 계열사도 장기 회사채 발행이 활발했고, LG화학ㆍLG디스플레이ㆍLG하우시스ㆍLG유플러스 등 LG그룹 계열사들도 5년물 이상 회사채 발행이 많았다.

이밖에 현대차ㆍ기아차 등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 한화케미칼, 효성, 대한제당, 만도, KT, 대우인터내셔널, CJ, LS전선 등 대기업들도 장기물 회사채 발행 대열에 포함됐다.

오는 22일 3천억원 규모로 회사채를 발행하는 KT는 총발행 물량의 절반이 넘는 1천600억원을 20년 만기로 발행한다. 국내 기업 가운데 만기가 20년인 회사채를 발행하는 첫 케이스다.

포스코는 10년물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했고, 기아차는 특이하게도 만기가 6년인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27일 2년9개월만에 회사채를 발행하는 SK텔레콤도 10년물로 2천억원의 자금을 조달할 예정이다.

만기가 5년 이상인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들은 신용등급이 'A+' 이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AA' 이상의 기업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만기가 긴 회사채 발행이 늘어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다.

2008년 리먼사태에 대한 학습효과와 함께 최근 저공비행을 하는 국고채 금리가 주요 배경이 되고 있다.

우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내 대기업들은 2009년초부터 무차별적으로 회사채 발행을 늘렸다. 신용경색으로 은행들이 자금줄을 막아버리자 직접금융시장인 회사채 시장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금융시장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 보니 신용등급이 좋은 기업들도 만기가 긴 회사채를 발행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이 3년짜리였다. 금리도 높았다. 신용경색에 따른 비용을 톡톡히 치른 것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올해 회사채 만기가 집중됐다. 내년 초까지 만기 집중 현상은 이어진다. 그런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발 재정위기로 신용경색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2009년에 비해서는 발행비용이 많이 낮아졌다. 신용도만 좋다면 2009년에 비해 금리를 절반 수준으로 낮춰서 발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더라도 만기를 과거처럼 3년으로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증권사의 기업금융 담당자는 "기업들이 리먼사태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에 만기를 분산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만기를 늘려 앞으로 자금집행의 집중도를 분산하는 일종의 리스크 헤지 전략인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국고채 금리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움직이는 것도 장기물 발행을 이끄는 요인이다.

국고채 금리가 워낙 낮다 보니 보험사 등 장기물 투자기관들이 자금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국고채보다는 금리가 높고, 신용도가 좋으면서 만기가 긴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에 대한 투자 수요가 확대됐다. 수요와 공급, 시장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증권사의 한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보험사 등의 회사채 투자가 늘면서 장기물 회사채의 발행도 늘어난 측면이 있다"며 "이러한 현상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국고채 금리의 방향에 달린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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