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발생한 미국발 금융위기는 몇년 후 유럽의 재정위기까지 전이돼 세계 경제에 심각한 생채기를 냈다. 대략 2012년까지 세계 경제는 암흑기에 돌입했는데, 당시 그나마 우리 경제에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한 것은 슈퍼 엔고였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엔화 가치는 2008년에 달러당 100엔을 돌파한 데 이어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같은 해 11월엔 달러당 75.31엔까지 폭등했다.

지진으로 일본 경제가 충격을 받을 것이 뻔함에도 일본 화폐인 엔화가 오히려 강세를 보인 난센스는 '안전통화의 역설'에 그 이유가 있었다. 세계적 위기가 발생하면 강세를 보이는 안전통화엔 엔화와 스위스프랑 등이 있는데 일본에서 발생한 위기가 오히려 안전 심리를 자극해 전 세계 투자자들의 엔화 매수를 늘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엔화 가치가 전례 없는 수준인 75엔까지 올랐고 일본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우리에겐 두 가지 측면에서 호재였다. 엔화가 급격한 강세를 보이면서 우리 경제에 전반적으로 약으로 작용했고, 세계 금융위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지진으로 일본의 공급망이 궤멸되는 초대형 악재를 맞아 일본 경제는 고난의 시기를 겪은 반면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기업들은 수출 경쟁력이 개선되면서 반사이익을 누렸다.


2008년~2013년까지 달러-엔 환율 추이
연합인포맥스 차트(화면번호 5000)


그러나 엔화 강세가 천년만년 계속되진 않는다. 엔화는 변동성이 크기로도 유명한데, 엔고의 반작용으로 다시 엔저의 파동이 오기도 한다. 작년부터 진행된 미국의 고강도 금리 인상 이후 시작된 슈퍼 엔저의 기세가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통상 엔화가 약세를 보이면 우리 경제엔 악재다. 달러당 150엔에 육박한 최근의 슈퍼 엔저가 우리 경제에 주름살을 깊게 패고 있다. 수출 기업들은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쉽지 않고, 거시경제 환경 전반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가뜩이나 세계적 고물가와 고금리, 경제불황이 맞물려 수출 활로를 찾기 어려운 마당에 엔화 약세가 장기화되면 우리 경제회복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글로벌 흐름을 보건대 당분간 엔화 약세가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아직 명확히 끝났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데다 일본은 돈 풀기 정책을 일부 수정했음에도 엔저의 방향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호시절은 이제 지난 것 같다. 엔-원 재정환율을 보면 상황은 더 비관적이다. 7월31일 기준 엔-원 환율은 893원이다. 2015년 기록한 최고치 882원(2015년 6월)에 거의 근접했다. 이는 엔화에 비해 원화 가치가 급격히 올라간 상태라는 뜻이다. 정부 당국과 재계, 소비자들 모두 이제는 슈퍼엔저를 상수(常數)로 놓고 경제계획을 짜야한다.


2015년 엔-원 환율과 2023년 엔-원 환율 비교


우리나라 원화가 상대적으로 비싼 환경이 계속되면 수출 경쟁력 약화가 우려된다. 이에 반해 일본 경제는 환율 경쟁력을 바탕으로 앞으로 승승장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중 갈등을 계기로 한 지정학적 변혁기도 일본은 잘 활용할 것이다. 미국과 강한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것으로 보인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은 이미 대만을 지정학적 위험지역으로 보고 상대적 안전지역인 일본에 과감히 투자 비중을 높이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신기술의 공급망에서도 수혜를 볼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경제의 부활에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달라진 국제정치 및 경제 환경에서 일본과 우리나라는 관계는 경쟁자이자 협력자다. 치열한 수출시장에서 경쟁하기도 하지만, 공급망 구성에서 서로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반도체, 이차전지 등 첨단산업에서 새로운 공급망 질서가 구성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위기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과 경제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나갈지 우리에겐 중요한 숙제가 될 것이다. (편집해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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