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 최근 은행권 최고리스크책임자(CRO)의 '입'에 모두가 집중한다.

달라진 풍경이다. 이미 콘퍼런스콜 등 투자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최고재무책임(CFO)보다 CRO의 발언 시간이 더 늘어난 분위기도 감지된다.

투자자들의 관심은 자본비율과 주주환원, 실적관리 등 CFO의 영역에서 최근엔 충당금과 연체율, 프로젝트파이낸싱(PF) 익스포저 등 CRO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은행권을 둘러싼 글로벌 리스크가 '진행형'인 데다, 국내에서도 새마을금고를 시작으로 연체율 악화 조짐이 지속되면서 은행권 CRO의 '입'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셈이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 5대 금융지주가 올해 상반기에 쌓은 충당금은 4조8천억원에 달했다.

1년 전 같은기간 이 규모가 2조4천억원 수준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정확히 2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는 전형적인 CRO의 업무 중 하나다. 향후 업황과 리스크에 대한 가정을 통해 쌓아야 할 충당금을 설정하고, 섬세한 논리를 바탕으로 조직을 설득시켜야 한다.

당연히 조직은 CRO의 입김이 강해지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충당금 확대는 순이익 규모와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아 투자자와 내부 임직원들은 어느 정도의 '경계감'을 갖고 있다.

은행권의 한 CRO는 "CRO를 만나는 것은 뭔가 리스크가 생겼다는 시그널인 만큼, 심지어는 최고경영자(CEO) 조차CRO를 만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CRO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쓴소리'를 먼저 해야 하는 만큼 고충이 큰 위치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엔 상황이 변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과 크레디트스위스 사태 등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은행권의 최우선 과제는 '실적개선' 보다는 '손실흡수능력' 확보에 맞춰져 있다.

손실흡수능력 관리의 대부분은 CRO 책임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연체율 관리와 충당금 설정·환입, 인수·합병(M&A) 등을 위한 투자심의위원회, 부동산 PF 부실 관리 등 최근 은행권을 둘러싼 현안들의 소관이 CRO의 영역인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며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CFO보다 CRO의 파워가 더 세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그래픽] 부동산PF 대출 현황
(서울=연합뉴스) 박영석 기자 = 20일 금융감독원이 국민의 힘 윤창현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금융권의 부동산 PF 대출잔액은 131조6천억원으로 지난해 12월 말의 130조3천억원에서 3개월 만에 1조3천억원이 늘었다. 금융권의 부동산 PF 대출잔액은 2020년 말까지만 해도 92조5천억원으로 100조원을 넘지 않았는데 2021년 말 112조9천억원 등으로 매년 급증하는 추세다. zeroground@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페이스북 tuney.kr/LeYN1


최근 한 금융지주의 상반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도 달라진 CRO의 위상은 그대로 드러났다
애널리스트들은 충당금 설정 규모의 배경과 향후 계획, 경기 및 업황 가정의 논리, PF 익스포저와 부실 가능성, 연체율 현황 등에 대해 집중 질문했고, 이는 대부분 CRO의 답변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은행권 리스크 관리 부문이 주목받고 있는 데는 금융당국의 역할도 컸다.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경기대응완충자본과 스트레스완충자본, 특별대손준비금 적립요구권 등 '자본확충 3종 세트' 적용을 예고한 상태다.

선제적으로 충분한 수준의 손실흡수능력을 갖추라는 얘긴데, 이를 고려하면 충당금 이슈는 올해를 넘어 향후 수년간 은행권의 핵심 이슈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다.

연체율 관리도 이제 막 시작이다.

주요 금융지주들이 보유한 은행들의 연체율도 최근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향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환유예 등 지원 정책 종료에 따른 충격에도 대비해야 한다.

은행권 관계자는 "경기 둔화 상황에서 고금리가 장기화했고 이에 따른 부실 폭탄이 터질 것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며 "경기가 꺾이면서 리스크 관리 부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급격히 커지고 있다"고 했다.

가장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5대 금융지주 CRO들은 15년여 전부터 리스크관리 부문에서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들이다.

과거 2000년대 중반 바젤Ⅱ가 도입될 당시 은행권에 미칠 영향과 리스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금융감독원 회의를 오갔던 실무자들이 현재는 주요 금융지주 CRO로 활약하고 있다.

글로벌 은행 위기가 국내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에는 축적된 CRO들의 '전문성'도 한 몫했다는 평가가 많다.

올해 상반기 CRO들은 예상보다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부도 발생확률(PD·Probability of Default)을 더 보수적으로 바꿔 충당금을 확대하는 조처를 하기도 했다.

금융권의 다른 CRO는 "최근엔 더 보수적인 경기 가정을 통해 하반기 리스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며 "결국 하반기엔 연체와 부도가 늘어나는 것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가장 주요한 사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금융부 정원 이수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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