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오진우 기자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뜬금없이 총선 선거운동 판에 등장했다. 재개발 활성화를 위해 기준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요청을 들고 온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를 집무실에서 만나 사진까지 찍었다.

통화정책 전환이 논의되는 민감한 시기에 정책에 대한 신뢰를 깎아내릴 위험한 행보라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한은 등에 따르면 이 총재는 최근 경기 성남 분당을 지역 국민의힘 총선 후보자인 김은혜 전 대통령실 홍보수석을 면담했다.

김 후보자는 지난 1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총재와의 면담 사실을 알리면서 "1기 신도시 재건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 총재를 만났다. 근본적인 해답은 바로 기준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김 후보자는 "반드시 금리인하를 해주셔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총재는 "통화신용정책을 통해 나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한은에 주어진 의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총재와 김 후보자 대화 주제는 물론 면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은행의 존립 근거는 대중의 신뢰다. 신뢰는 중앙은행이 정부나 정치, 혹은 특정 산업군의 이해로부터 독립적으로 정책을 편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한은이 과거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받는 현시점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됐다.

이 총재 취임 이후부터는 아슬아슬 줄타기다. 그가 역대 어느 총재와도 다른 독특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이 총재는 경제부총리 등 정부 경제·금융 수장과 매주 정례적으로 만나 정책을 논의한다.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도 주기적으로 참석한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일로, 한은도 '정부의 일원'임을 공히 드러낸다.

이 총재는 자신감이 넘친다. 한은 독립성에 악영향을 줄 수 있지 않냐는 지적에 대해 "한은이 정부를 만나서 정부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안 하나, 정부의 독립성이 사라진다고 왜 거꾸로 안 물어보냐"고 반문한다.

이 총재의 자신감과 달리 외부의 시각은 아직 불안하다.

한은이 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2022년 정책수행 및 평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보고서'를 보면 '독립성'에 대한 긍정 평가 비율은 41.9%에 그쳤다. 주요 항목 중 소통 다음으로 점수가 나빴다. 도덕성과 전문성 등이 60% 이상 긍정 평가를 받는 데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이번처럼 총선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선거를 뛰는 정치인과 면담은 이전의 어느 총재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행보다.

게다가 김 후보자는 대통령실 홍보수석을 지낸 여권의 핵심 인사다. 한은과 정부·여당의 밀착에 대한 의구심을 사지 않을 수 없다.

면담의 내용은 더 위험했다. 김 후보자는 재건축을 위해 금리를 내려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지금은 통화정책 딜레마가 큰 시기다. 물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는 만큼 경기를 지원하기 금리를 내릴 필요성이 제기된다. 반면 이미 너무 높은 집값이 다시 오르고 부채가 늘어날 수 있어 금리 인하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팽팽히 맞선다.

향후 금리가 인하된다면 결국은 부동산 부양을 위한 결정일 것이란 인식도 여전하다. 이 총재도 인정했듯 과거 경기가 나쁠 때마다 유동성을 투입해 부동산을 부양해온 경험칙에 따른 것이다.

이를 의식해 이 총재는 매번 디레버리징이 필수적이며, 통화정책으로 부동산 경기를 떠받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지난해 특례보금자리론 지원과 올해 금융중개지원대출 확대 등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도 없지 않았다. 통화정책이 여전히 부동산 우선이라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다.

올해 하반기 한은이 금리를 내릴 가능성은 상당하다. 한은은 물가가 목표치인 2%까지 내리지는 않더라도, 조만간 그럴 것이란 확신을 가지면 금리를 내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때는 물가가 2%보다 높은 상황에서 금리를 내리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한은 총재가 재개발 활성화를 위한 금리인하를 요청하는 유력 정치인을 선거 직전에 만난 점이 이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한은이 부인하고,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부동산 부양을 위한 결정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금융통화위원회의 논의에도 부담을 배가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한은은 김 후보자가 이 총재와 면담을 선거 운동용으로 사용할 줄 몰랐다는 입장인 것 같다. 하지만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더불어 이 총재의 언행 하나하나는 '개인 이창용'이 아니라 우리나라 중앙은행의 역사로 기록된다는 점도 유념했으면 한다.

면담하는 이창용 한은 총재와 김은혜 후보자
김은혜 후보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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