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피혜림 기자 = 한국물(Korean Paper) 시장에서 '최초'의 역사를 쓰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동훈 한국수출입은행 자금시장단장이다. 그는 올 초 단 한 번의 발행으로 30억 달러를 찍어내 한국물 점보 딜(jumbo deal)의 이정표를 썼다.

'30억 달러'는 수급 부담 등을 이유로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조달 금액이다. 대한민국 정부 이외엔 최초의 시도로 이번 성공으로 한국물 시장은 한층 성장했다. 한국수출입은행 역시 국내 기업에 대한 대출 자금을 저금리로 마련한 것은 물론, 한국물 조달 확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단번에 '30억 달러' 조달, SSA 발행사로의 도약 '성큼'

이동훈 단장은 19일 연합인포맥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수출입은행의 여신 수요 증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Fed)의 통화정책 전환, 진정한 정부·국제기구·기관(SSA) 발행사로의 도약 등을 위해 30억 달러라는 대규모 채권 발행이 적절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가속화 등으로 외화 여신 수요가 꾸준히 늘면서 올해 시장에서 조달해야 하는 자금만 155억 달러에 달한다. 나날이 늘어가는 자금 수요에 발맞춰 대규모 발행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미국 조기 긴축 가능성이 높아진 점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뒷받침했다. 지난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미국 금리 인상 가능성이 대두된 탓에 발행사들은 금리가 더 오르기 전 자금 마련에 서두르고 있다.

눈에 띄는 점은 SSA 발행사로서의 고민이다. SSA는 정부·국제기구·기관(Sovereign, Supranational&Agency)의 약자로, 글로벌 채권시장에선 초우량 발행사로 손꼽힌다. 한국수출입은행 역시 SSA 발행사로서 높은 안정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 단장은 SSA로 불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SSA 채권의 주요 투자자층을 주목해 '사상 최대 조달'의 가능성을 읽었다.

그는 "SSA채권의 주요 투자자는 트레이딩(trading)이 아니라 장기 보유를 위해 투자에 나선다"며 "이들은 대규모 자금력을 바탕으로 덩어리(chunky) 단위로 주문을 넣는다는 점에서 트랜치(tranche) 당 10억 달러 이상의 딜에 주로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한국물 SSA 발행사로서의 한계를 느낀 지점이다. 통상적인 한국물 발행 규모를 고려하면 트랜치를 다변화할수록 주요 투자자층을 겨냥하기 어려운 구조다.

한국물의 경우 통상 20억 달러 조달만으로도 빅딜(big deal)로 손꼽혀왔다. 국내 기관의 외화 조달 수요가 크지 않았던 데다 대규모 물량이 단번에 나올 경우 투자자들의 수급 부담이 커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과감히 30억 달러의 벽을 깨뜨렸다.

그는 "진정한 SSA 채권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트랜치 당 최소 10억 달러를 배정하는 시도가 필요했다"며 "발행 물량이 커질수록 북빌딩 경쟁률이 비교적 낮아져 금리 조건이 열악해질 것이란 통념이 SSA 발행사에는 예외라는 점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판단은 적중했다. 올해 첫 한국물로 '30억 달러' 발행에 나선 한국수출입은행은 북빌딩(수요예측)에서 발행액의 2배가 넘는 60억 달러의 자금을 확보했다. 3년과 5년, 10년 고정금리부채권(FXD)으로 각각 10억 달러씩 배정했다.

금리 절감 효과도 톡톡히 누렸다. 한국수출입은행은 3년과 5년, 10년물 가산금리(스프레드)를 동일 만기의 미국 국채금리에 각각 25bp, 30bp, 50bp 더해 발행했다. 최초제시금리(IPG, 이니셜 가이던스)보다 최대 35bp 줄어든 수치로, 풍부한 주문량에 힘입어 스프레드를 끌어내렸다.

그는 미국의 통화정책 전환이 본격화된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번 딜을 위한 준비 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한국수출입은행만의 조직력 또한 성공 밑거름이 됐다.

그는 "수출입은행의 경우 경영진부터 국제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데다 유연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곳"이라며 "국내 은행의 경우 통상 1월 초 첫 조달에서부터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국수출입은행은 지난해 11월 방문규 은행장과 뉴욕을 직접 방문해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IB) 고위급 임원과의 면담을 진행하는 등 경영진의 수용에 힘입어 발행 기반을 갖춰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외 조달 시장 개척, 벤치마크 위상 확고

그의 도전을 '30억 달러'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가 자금시장단을 맡은 후 한국수출입은행은 '최초'의 역사를 잇달아 쓰고 있다.

이 단장은 지난해 국내 금융기관 최초로 20년물 달러채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에서의 첫 시도로, 한국물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의 벤치마크 역할을 자처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원화 조달시장에서도 노련함을 드러내고 있다. 국내 채권시장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변동성이 극대화됐다. 8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함께 시장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발행 만기 등을 다변화하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응했다. 1년 이하물은 물론, 1개월물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와 연계한 변동금리부채권(FRN) 등으로 리스크를 상쇄했다.

그는 '시장'에서 답을 찾았다. 이 단장은 "자금시장단의 경우 매일 원화와 외화 금융시장 동향 등을 다룬 보고서를 작성토록 해 '시장을 읽는 눈'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시장을 살피다 보면 경제 이론 등으로 정답을 찾고자 하는 성향이 커지곤 하는 데 이에 매몰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장은 시장이고 그 자체로 이해하도록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증권사 육성 역시 그가 힘쓰는 부분 중 하나다. 한국수출입은행은 지난해부터 모든 달러채 발행 시 국내 증권사 한 곳을 주관사로 선정해 토종 IB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방문규 은행장을 비롯해 조직 내부적으로도 여의도에서 글로벌 금융기관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며 "국내 제조기업이 분야별로 글로벌 순위권에 오르고 있듯 증권사나 금융산업 역시 해당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금리 시대가 막을 내리며 조달 환경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그는 "한국수출입은행은 한국물 벤치마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금리 인상기에도 낮은 스프레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올해는 규모와 만기를 적절히 배분하는 것은 물론 발행 통화를 분산하는 등의 방식으로 미국 통화정책 전환에 대응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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