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인공지능(AI) 산업이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빨아들이는 가운데 글로벌 연기금도 엮여 들어가면서 '대마불사'의 볼모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AI 인프라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면서 부채 조달 비중도 급증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연기금의 자금이 상당 부분 'AI 테마'에 묶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금융시장을 짓누르는 'AI 거품론'이 현실화한다면 노후자금인 연기금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각국 정부들은 어쩔 수 없이 구제금융에 나서야 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
[연합뉴스 자료사진]

 

AI 인프라 투자에서 특히 연기금의 익스포저(위험 노출)가 커지고 있는 분야는 사모신용(private credit) 분야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데이터 센터와 전력망 등 AI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2028년까지 약 3조달러가 투입될 전망이다. 이 가운데 1조4천억달러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자체 현금 흐름으로 충당되지만 나머지 자금은 외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 절반 이상은 사모신용 시장이 자리를 채울 것으로 보인다.

사모신용 시장의 AI 인프라 익스포저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UBS는 최근 3분기 동안 사모신용을 통해 AI 분야에 공급된 자금은 분기당 약 500억달러 수준으로 추산됐다. 이는 같은 기간 공모 시장을 통해 공급된 자금량의 2~3배에 이르는 규모다.

UBS의 추정치는 메타가 루이지애나에 AI 데이터 센터를 짓기 위해 사모신용 펀드로부터 조달한 290억달러의 자금은 제외된 수치다. 메타의 사모신용 거래를 포함해 다른 대규모 조달까지 포함하면 AI 인프라에선 이미 사모 대출 자본은 전체 부채 조달의 약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사모신용 시장의 상당 부분을 연기금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JP모건체이스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전 세계 사모신용 시장의 운용자산(AUM)은 2조1천300억달러를 넘어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분석에 따르면 이 가운데 사모신용 펀드의 투자액 중 알려진 부분만 놓고 봐도 연기금이 약 34% 정도를 차지한다. 19%의 보험사보다 두 배 가까이 비중이 크다. 게다가 비공시 투자까지 합치면 연기금의 사모신용 내 비중은 40%에 육박할 것이라는 관측도 더러 나온다.

이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의 AI 설비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연기금도 더 깊게 발을 들일 수밖에 없고 그만큼 위험도 커진다는 의미가 된다.

오라클이 데이터센터 건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일으킨 총 380억달러 규모의 부채 차입과 그에 따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의 급등은 연기금이 '위험한 게임'에 발 담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국 투자회사 DA데이비슨의 길 루리아 기술 분석 총괄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인프라 투자는 AI 열풍의 건전한 부분을 보여주지만, 다른 부분은 자체 고객 없는 투기 자산"이라며 "대출자들이 AI 분야에 자본을 쏟아붓느라 리스크 평가를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부채가 부실해질 경우 기술산업을 넘어 경제 전반에 파급효과가 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헤지펀드 프래토리언캐피털의 해리스 쿠퍼맨 설립자는 "데이터센터 자산이 매출 대비 2배 빠르게 감가상각될 것"이라며 "과도한 인프라 투자에 따른 채무상환 부담이 있다"고 짚었다.

사모신용이 무서운 점은 뚜렷한 위기 신호가 없다가 한 번에 위기가 몰려올 수 있다는 점이다. 평시에는 장부가가 높게 유지되고 가치 하락은 늦게 반영되지만 위기시엔 유동성이 잠기고 채권자 협상이 지연되면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는 것이 사모신용의 특징이다.

더 큰 문제는 연기금이 사모신용뿐만아니라 사실상 AI 테마에 전방위적으로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연기금은 주식 부문에선 인덱스를 추종하는 포트폴리오를 짠다. 벤치마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의 구성 종목별 비중과 포트폴리오를 비슷하게 유지하되 전략에 따라 변화를 두는 식이다.

하지만 이른바 7대 기술기업인 '매그니피센트7(M7)'이 S&P500의 시가총액 중 약 35%를 차지하게 되면서 지수추종 전략은 사실상 M7 변동성에 크게 휘둘리는 상황이 됐다.

블랙록은 최근 보고서에서 "이 정도 집중도면 몇 개 종목이 흔들릴 때 포트폴리오 리스크가 매우 커진다"고 지적했다.

회사채 시장에서도 연기금은 하이퍼스케일러에 대한 익스포저와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은 AI 설비투자를 위해 올해 들어 회사채를 대거 발행하는 중이다. 지난주 아마존은 150억달러 규모로 회사채를 찍었고 알파벳은 이달 초 총 250억달러 규모로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난달엔 메타가 300억달러 규모로 채권을 발행했으며 오라클의 회사채 발행액도 부채 조달액 380억달러 중 180억달러에 달한다.

연기금들은 해당 회사채에 직접 투자하거나 출자한 위탁운용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익스포저를 늘려가고 있다. 결국 연기금은 AI 테마와 관련해 주식과 채권, 사모신용에 더해 사모 인프라와 부동산까지 모든 면에서 대규모 익스포저를 가진 셈이다.

달리 말하면 AI 광풍에 올라탄 빅테크들은 국민들의 노후자금인 연기금을 사실상 '볼모'로 잡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AI 거품이 꺼질 경우 주가와 회사채 가격, 인프라와 부동산 가치가 급락하고 사모신용 시장이 휘청거리면 각국 정부로선 손 놓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픈AI의 경영진이 미국 연방 정부의 보증이 필요하다고 발언한 뒤 여론의 뭇매를 맞았으나 이미 AI 산업은 구제금융 채널을 확보해뒀다고 봐도 무방하다. (진정호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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