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연합인포맥스) 정원 기자 =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유가마저 낮아지면 경기 활성화를 더욱 억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개별 국가에 에너지 정책 조언을 전담하는 안톤 하프 국제에너지기구(IEA) 석유산업시장부 부장은 유럽의 상황을 이같이 진단했다.

지난달 방문한 프랑스 파리는 연일 하락 기조를 보이는 국제유가에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파리는 IEA를 비롯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 기구들이 즐비한 곳으로, 세계경제 상황에 대한 진단과 전망에 가장 민감한 곳 중 하나다.

<프랑스 파리 OECD 전경 / 사진 = 정원 기자>

IEA의 한 관계자는 "최근 유가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회원국들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해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를 뜨기도 했다.

파리의 분주함은 유럽 국가들이 느끼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의미한다.

유로존이 디플레이션 위기를 타개하고자 그간 쏟았던 노력들이 유가하락이라는 암초를 만나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도 나왔다.

저유가로 글로벌 석유기업들이 매출과 수익에 직격탄을 맞으면서 잇따라 투자 축소를 선언하고 나선 점도 유럽의 공포를 심화시켰다.

◇ 디플레에 기름 붓는 '저유가'

샤를 드골 공항에서 차로 50분 가량 달려 파리에 도착하자 다소 침체된 분위기의 시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럽연합(EU) 통계기관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지난 2월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은 -0.3%에 그쳤다. 작년 12월 -0.2%, 올해 1월에 이어 3개월 연속 마이너스(-) 물가다.

지난 1월 그리스(-2.8%)와 스페인(-1.5%) 등의 취약 국가 뿐 아니라 독일(-0.5%)과 프랑스(-0.4%)까지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보이면서 유럽 전반에는 디플레이션의 우려가 점증하고 있다.

기존 경기 침체 상황에 저유가의 충격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많았다.

프랑스 국립경제대학교의 학생인 뚜자씨는 "(저유가는) 프랑스에 이익이 거의 없다고 본다"며 "개인주택 거주자는 난방비 절감이 되겠지만 큰 영향은 아니다. 소비를 늘릴만한 구석이 없다"고 말했다.

기름값안에 유류세 등이 높은 비율로 포함된 점도 저유가 상황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아멜리씨는 "대중교통 요금은 되레 올라 체감하기 어렵다. 유가가 낮아졌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고 전했다.

파리의 연구기관들은 유가가 하락한 점이 단기적으로 디플레이션 우려를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 또한 유로존의 유가 하락이 고실업과 저물가, 정치적 불확실성 등 불리한 경제 여건하에서 나타난 만큼 유가 하락에 따른 긍정적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이 향후 유로존 디플레이션 극복의 관건이 될 것이라는 점에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함께 했다.

ECB는 올해 3월부터 오는 2016년 9월까지 600억유로 이내에서 유로화 표시 채권을 매입한다는 계획이다.

안톤하프 국제에너지기구(IEA) 석유산업시장 부장은 "저유가는 경기 침체를 가속화할 뿐 아니라 장기화하는 데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경쟁자에 비해 선투자에 나서는 것이 장기적으로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되레 저축률이 높아지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에너지업체 잇단 '긴축선언'

저유가의 파장이 지속되면서 유럽 내 에너지 기업들이 일제히 긴축에 나섰다. 이 때문에 유럽 내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프랑스의 대표 에너지 기업인 토탈사의 파트리크 푸야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토탈은 저유가에 대한 대응으로 다수의 업스트림(원유 생산 등) 프로젝트에 대한 지출을 제한하고 올해 계획했던 미국 육상 시추를 내년으로 미루겠다"고 말한 바 있다.

투자규모도 확 줄였다.

토탈은 영국 북해와 캐나다 오일샌드, 가봉, 콩고 등의 서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작년보다 10% 가량 줄어든 260억달러만을 지출할 계획이다.

토탈사가 운영권을 맡기로 한 불가리아 흑해 해상 광구 탐사 프로젝트도 오는 2016년 중반으로 연기됐다. 신규인력 채용도 당분간 중지될 예정이다.

토마 포르셰 프랑스 경영학교(ESG) 교수는 "글로벌 메이저 석유회사들의 모두 투자를 줄이고 있는 상황"이라며 "미국의 베이커휴즈는 7천명에 달하는 직원을 구조조정 할 계획이고, 영국 석유회사 BP도 감원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토마 포르셰 프랑스 경영학교(ESG) 교수가 연합인포맥스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 에너지 기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사진 = 정원 기자>

◇ '미래 에너지' 신재생은 끝까지 간다

저유가의 주원인으로 평가받는 셰일오일의 생산량 증가는 유럽 에너지 정책에도 적잖은 부담이 되고 있다.

과거 고유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신재생에너지 등 투자 비중을 넓혀 온 유럽에게 새로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어서다.

그동안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OPEC 등 산유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유럽은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높여왔다. 그러나 석유와 가스가격이 하락하면서 기존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했다.

<케이스케 사다모리 국제에너지기구(IEA) 에너지안보국 국장이 연합인포맥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럽 신재생 에너지 사업의 전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사진 = 정원 기자>

다만 케이스케 사다모리 국제에너지기구(IEA) 에너지안보국 국장은 "재생에너지 시장은 정책적인 조치로 흘러가는 측면이 더 크다"며 "정책 기조가 일정하다면 신재생에너지의 성장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태양광과 풍력 발전용 터빈의 가격이 매우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j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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