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는 수십 년 만에 한 번씩은 파충류나 곤충류 등이 자라면서 그러하듯이 탈피(脫皮)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인구는 계속 증가하면서 각 개인의 삶의 질적 수준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의 부(富)를 만들어 내는 틀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생각들이 모이게 된다. 또한, 일부 특권층(기술 선도 국가)만이 독점하면서 빠른 부를 창출해낼 수 있었던 혁신적인 기술이 세상에 알려져 그 기술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범용 기술이 되는 시기가 오면, 세상의 헤게모니를 잡고 싶어 하는 계층의 탈피에 대한 욕구도 가세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은 약 백 년 만에 한 번씩 산업혁명과 수십 년 만에 한 번씩 장기 경기 사이클을 겪어왔다. 프리만과 루카의 저서를 보면, 시기별 주요 기술과 주력 산업의 변천을 알 수 있다. 각 파동마다 리딩 산업이 있고 리딩 산업을 뒷받침하는 핵심 투입재 생산 산업이 있다. 이 산업들이 경제 성장을 이끌고 다른 섹터보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의 핵심 산업이다. 그리고 시기별 리딩 산업이나 핵심 투입재 산업을 가질 수 있는 국가는 번영의 길을 걷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그 국력이 쇠락하게 된다.

학자에 따라 산업혁명과 파동의 분류 기준이 다르겠지만, 현재 세상은 3차 산업혁명 중 5차 파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전과 다른 점은 핵심 투입재가 광물을 1차 가공해서 만들어지는 중간재가 아니라, 정보처리소자라는 점이다. 즉 정보화 시대의 핵심인 반도체이다.
 

 


한국 경제가 지난 개발연대(1970~1980년대)에 빠른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의 핵심 산업에 어느 정도 접근했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도 3차 산업혁명 중 5차 파동에 해당하는 산업들인 통신, 반도체 등의 IT 영역으로 우리 산업의 주력을 신속히 바꾸었기에 고도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국 경제, 아니 우리 기업인들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장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기술과 신산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세상의 변화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그 중심이 되는 핵심 산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장점은 세상이 변화하는 타이밍, 즉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는 탈피(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고 재빠르게 발을 담글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남았고 여태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지금이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면서 한국 경제가 변화해야 하는 타이밍일 수 있다. 우리 수출과 투자의 각각 약 20%에 달했던 반도체 산업에 그 한계성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흔히 언급되는 이유는 우리 기업들이 강점을 보이는 반도체 품목이 메모리라는 점이다. 메모리반도체는 제품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호불황의 진폭이 커지면서 매우 불안정한 시장으로 변화하는 추세이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을 보면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전사 영업이익이 6천402억 원 흑자를 기록했으나, 반도체 부문에서만 4조6천5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SK하이닉스도 1분기 3조4천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우리 반도체의 1분기 적자 규모는 8조 원에 육박한다. 반면 대만 기업인 TSMC는 1분기 약 10조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TSMC도 메모리반도체가 주력이지만 생산·판매 방식이 파운드리(고객 주문형 시스템)이기 때문에 가격하락이나 재고 리스크가 없어 그래도 선방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그렇지 못했다.

다음으로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전망 자체가 어둡다는 측면이 있다. 다가오는 새로운 글로벌 산업 파동에서 메모리반도체는 리딩 산업도 핵심 투입재도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반도체 산업의 고기술·고부가 첨단 영역은 급속한 디지털 전환 속에서 비메모리반도체(알파고와 챗GPT로 대변되는 '생각하는 반도체'까지 포함)에 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이 강점을 보이는 '저장하는 반도체(메모리반도체)'는 저부가 영역으로 내려간 지 오래다. 메모리반도체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30%에 불과하고, 비메모리와 메모리 부문의 부가가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의 위상은 더 하락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둘째,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꺾으려 들면서 중국 시장이 점점 활력을 잃어감에 따라,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추구하는 규모의 경제를 통한 수익성 확보 전략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전체 반도체 수출의 약 40%가 중국 시장으로 가고 있다. 현지 생산분을 포함할 경우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반도체법 등을 통해 동맹국들의 중국 시장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중국 내수시장을 잃어버릴 경우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은 크나큰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셋째, 메모리반도체의 기술적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최근 삼성전자·TSMC가 2나노 반도체 전쟁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그것이 한계일 수 있다고 많은 연구자들이 언급한다. 일부에서는 1나노미터(1m를 10억분의 1로 쪼갠 것)를 넘어 100억분의 1로 쪼개는 옹스트롬(Angstrom)이 연구된다고 한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는 속도는 가면 갈수록 빠를 수가 없다. 특히 산업적 측면에서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상용화가 가능해야 한다는 점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즉, 선도기업들의 기술적 성과는 지체되고 후발 기업들의 추격은 빨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메모리반도체는 초기술 격차가 유지될 수 없는 산업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우리 기업들의 경쟁 상대가 대만의 TSMC가 아니라 이름도 생소한 처음 들어 보는 중국 기업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솔직히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그리고 대만의 TSMC, 미국의 마이크론 등 메모리반도체 기업의 미래는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당장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이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느 산업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산업의 시황이라는 것이 업다운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조 단위의 흑자를 기록할 것이다. 나아가 세계 경제가 제자리를 찾으면 더 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멀리 본다면 새로운 산업 파동은 시작되었고 핵심 산업(리딩 산업과 핵심 투입재)의 변화는 감지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탄소중립이 그 파동의 진앙지이다. 그리고 리딩 산업 중 하나로 전기자동차가, 핵심 투입재 중 하나로 이차전지가 급부상하고 있다. 앞서 올해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부진한 실적을 언급했지만, 이는 사실 반도체 산업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유독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악화가 두드러져 보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 전반의 침체에 기인한다. 그런데 전기자동차와 이차전지 산업만은 거꾸로 가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1분기 영업이익이 3조5천927억 원을 기록하면서 그동안 항상 1위를 뺏기지 않았던 삼성전자를 제쳤다. 기아자동차도 1분기 영입이익이 2조8천740억 원을 기록하였다. 나아가 배터리 업체인 LG에너지솔루션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동기대비 144.6% 증가한 6천332억 원을 기록하였다. 또한 삼성SDI도 영업이익이 3천754억 원으로 전년동기대비 16.5%가 증가하였다. 분명히 산업 파동은 진행 중이며 세상은 탈피 중이다.

지금 벌어지는 국내 산업 지형의 변화 속에서 미래를 예측해 본다면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근본적으로 수요에 비해 공급 능력이 과도하기에 이전처럼 안정적이면서도 고성장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시장은 성장하겠으나 부가가치(이익)의 규모는 점점 감소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세상의 핵심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예상컨대 당분간 메모리반도체도 세상을 끌어가는 산업 중 하나일 것이나, 시간이 가면서 메모리반도체는 점점 밀려나고 세상의 중심은 비메모리반도체와 전기자동차(이차전지) 등의 산업으로 옮겨 갈 것이다. 그 가운데 다행히 우리 어떤 기업들은 예전처럼 세상의 중심이 되는 핵심 산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어내고, 새로운 시대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재빠르게 그 핵심에 발을 담글 것이다. 그러나 아마 과거의 영광에 매몰되어 따라가지 못하는 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업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기업이 성취했던 과거의 영광은 필요 없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할 뿐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이사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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